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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1

2025.3.31. 세상의 고통을 마치신 우리 엄마를 기리며

by 아침햇살

https://youtube.com/shorts/mU1VPZjWnj4?feature=share

2023,12,25- 95세인 엄마가 고관절 수술로 중환자실에 누워 계실 때 응원가를 만들어 들려 드렸다.


'오늘부자'는 되었습니다"

"오https://youtu.be/S842djOs6Z0?si=4e42IdOoMqkN2Igt부자



는 되었습니다!!!"

"오늘부자는 되었습니다"

엄마의 재치와 유머, 긍정적인 마인드를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이 아쉽다. 엄마는 1929년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고 온갖 태풍을 몸으로 받아낸 역사의 증인이셨다. 그 힘든 여정 속에서도 이렇게 재치 있게 오늘행복,오늘부자의 자세로 하루하루를 장식하며 보낼 수 있었다니 새삼 더욱 존경스럽고 사무치게 그립다.


아흔다섯까지는 그다지 큰 병은 없었다. 심장에 스텐트를 삽입하고 혈압약을 매일 드시는 것, 가끔 무릎에서 물을 빼고, 또 아주 가끔씩 허리를 치료하고, 아주 드물게 눈을 치료하시는 정도는 연세에 비하면 아주 감사할 일이었다.

속은 건강하시다고 늘 자부하시며 잘 드셨다. 미식가여서 맛도 잘 아시고 요리법에도 명석하셔서 우리가 해드리는 음식에 대한 평가는 깐깐하셨다. 우리들은 엄마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여러 번 엄마에게 자문을 구하면서 만들어드려야 했다. 언니들은 겨울에는 달콤한 무적을 부쳤고 봄이 오면 아버지 산소 근처에서 캐 온 쑥으로 쑥개떡을 만들곤 했다. 여름이면 냉천천에서 다슬기를 잡아다가 다슬기수제비를 만들어 드리면 제일 맛나게 드시곤 했다. 가을이 오면 동생들은 추어탕을 주로 드렸다. 맛있게 드시고 잘 주무셨고 또 잘 노시는 마인드까지 갖추셨었다.

다리를 절뚝이며 걸을 정도의 고통은 아흔의 연세에 능히 감당할 만하다고 하셨다. 아픈 것이 당연하다고 밥맛이 떨어지는 것도 당연하고 청소를 하기 싫고 샤워하는 것도 귀찮아지는 것은 그 연세에 당연한 것이고 당연히 지고 갈 십자가라고 하셨다.

그러나 2023년 12월 25일 성탄절에 불을 켜려고 일어나시다가 고관절을 다치셔서 수술을 하셨다. 수술 후 섬망증상으로 여러 날 우리를 당황케 하셨으나 시골집으로 들어가 큰언니와 형부의 보호를 받으며 곧 정상적으로 돌아오셨다. 다만 마음대로 걸을 수 없어서 농사를 못 짓는다는 것을 한탄하셨으나 화장실 출입을 겨우겨우 하면서는 그나마도 감사하다고 흥이 나셔서 얼굴이 밝아지기도 했다.

전통 한옥집의 구조상 엄마의 보행이 어려워 남동생들은 수시로 집안을 고치기 시작했다. 문턱을 다 없애서 엄마를 태운 휠체어의 이동을 쉽게 했다. 침상을 환자용으로 바꾸고 외풍이 심한 들창엔 비닐을 대어 바람을 막았다. 크리스마스철에 맞게 전구를 달아 온 집을 환하게 밝히고 퇴원 축하 잔치를 벌이며 "나는 행복합니다"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순조롭게 여생을 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작년 구월 일일 복통이 심하셔서 구급차를 타고 전주로 나오셨다. 하필 의료대란이 일어나 예수병원, 대자인병원, 전주병원 모두 거절을 당하고 간신히 대학병원에서는 받아주어서 입원을 하셨다. 약물치료를 시도했으나 연로한 탓에 병세가 악화되어 곧장 장경색 수술을 하셔야 했다. 그 연세에 또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한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래도 단 하루라도 고통 없이 사실 수 있다면... 우리는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아흔여섯의 연약한 엄마를 차가운 수술실로 밀어 넣어야 했다.

천만다행으로 수술은 성공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단장증후군, 패혈증 등의 후유증을 감수해야 했다. 다시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고 점점 기력을 잃어갔다. 여러 번 고비를 넘겼다. 밤중에 병원으로 실려오기를 여러 번.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그래도 진안 봉황산 자락 아래에 있는 엄마집으로 모시면 마음이 편해지셨다. 좀 더 안정적으로 치료가 될 거란 기대를 안고 큰언니 부부의 헌신으로 고향집에서 여생을 보내는 평화가 흐르기도 했다.

남동생들은 수시로 방문하여 집안을 손보고 엄마의 재활 운동을 위해 마음을 모았다. 언니들은 엄마의 섭생을 위해 소고기죽, 콩죽, 두부죽, 나물죽, 여러 가지로 바꿔가며 짧아진 장으로 좀 더 좋은 영양 흡수를 위해 연구했다. 큰아들처럼 믿고 의지하던 둘째 아들이 조석으로 안부를 묻고 며느리들이 해 오는 반찬으로 입맛을 찾기도 했다.

시골집으로 모신 후에는 그래도 잠을 잘 주무시고 마음에 안정을 찾으셨다. 그렇게라도 백세까지만이라도 우리 곁에 계시기를 소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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