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은 하염없이

by 아침햇살

그날, 구이면 광곡리 햇살농장에는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봄볕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듯, 꽃잎마다 윤이 났다. 어쩌면 그렇게도 여린 듯 단아하게 피어나는지, 눈부실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 순간, 이 꽃을 엄마께 보여드리고 싶었다. 아니, 꼭 보여드려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이 일었다. 한 가지 꺾어서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 엄마, 농장에 살구꽃이 피었어요."

"......"

" 엄청 예뻐요."

"......"

" 어서 퇴원하셔서 꽃 보러 가요.”

엄마는 내 말을 들으신 걸까. 감았던 눈을 떠서 천천히 나를 향하신다. “엄마, 나 보여요?” 엄마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마치 꽃잎에 이슬방울이 맺히듯, 조용히, 천천히.

엄마는 아흔여섯에 고관절 수술을 한 뒤 간신히 회복되던 즈음, 장경색으로 수술을 또 하셨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차츰 기력을 잃어갔다. “이젠 글렀어. 아직 준비가 안 되었는디.”삶을 포기하는 엄마에게 봄이 오면 꽃 구경을 가자고, 엄마가 좋아하는 우리 농장에 가서 꽃도 보고 노래도 부르면서 봄을 맞이하자고 했다. 엄마는 "긍게. 꽃 같은 날들도 있었는디. 이젠 느그들이 누리며 살어." 힘없이 웃으면서 손을 잡아주셨다.

엄마는 꽃을 참 좋아하셨다. 햇볕 다사로운 날이면 꽃이 피었는지 보러 가자며 고추밭 매던 호미를 땅에 푹 꽂고, 앞치마를 툭툭 털고는 마을 어귀로 나서곤 했다. 꽃을 보면 “눈이 훠언허고. 멤이 몽글몽글허네.”하시며 감탄을 연발하셨다. 매화, 벚꽃, 철쭉, 산수유, 목련, 살구꽃, 모란, 함박꽃…철마다 피는 꽃들을 잊지 않고 이름을 불러 주셨다. 함박꽃 앞에서는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가 있다~~.”아버지의 18번이었던 노래를 흥얼거리셨고, 살구꽃 아래에서는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노래를 부르셨다. 동행하는 이들을 덩달아 흥이 오르게 하셨다. 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데.

그 엄마가 지금, 천천히 천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계신다. 마치 꽃잎이 제 자리를 떠나는 것처럼, 너무도 고요하게. 그 걸음 위로 살구꽃이 봉오리를 터뜨리고 있다. 엄마가 그렇게도 좋아하시던 그 꽃들이, 이 순간에도 기운차게 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참 야속했다.

엄마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무력하게 서 있는 이 시간에도, 세상은 자기 할 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활발하게 이뤄가고 있다. 창밖엔 햇살이 쏟아지고, 병실의 시계는 여전히 초침을 재촉한다. 나는 그저 속삭이듯 엄마에게 부탁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지금 피어나는 저 꽃들의 힘을 빌려 일어나라고,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춘삼월을 십 분의 일이라도 맛보자고, 꽃그늘 아래서 나눌 이야기는 가슴에 쌓이는데 입을 열기도 전에 문이 닫히고 있음을 우리는 알았으나 극구 외면했다.

한 번만이라도 엄마랑 노래 부를 수 있기를. 한 번만 더, 가려운 등에 알로에라도 발라 드리고, 솟아오른 발톱도 깎아 드리고 싶었다. 즐겨 드시던 감자를 찌고, 누룽지를 끓여 드리고, 대소변을 받아내며 농담도 나누고 싶었다. 한 번만 더, 쭈글쭈글한 손을 잡고 “엄마,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마음은 봄날의 바람 속에 자꾸만 반복되고, 자꾸만 되뇌어진다. 한 번만 더.

하지만 마지막은 너무도 조용히 다가왔다. 침묵은 한 폭의 그림처럼 병실을 가득 채웠고, 나는 무너진 마음을 수습할 틈도 없이, 다만 엄마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눈가에도 미소가 피어나는 얼굴로 동백꽃이 떨어지듯 툭, 능소화가 지듯 툭, 그렇게 가셨다.

엄마는 떠나셨다. 그 순간 나는, ‘마지막’이라는 단어 대신, ‘처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엄마를 처음 이해했던 날처럼, 엄마를 처음 한 여자로 인정해 주던 날처럼, 목 놓아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 권. 옥. 순. 내 안에서 울리는 그 이름은, 내 안에서 꽃 씨앗으로 잉태되었다.

살구꽃은 여전히 피어 있고, 엄마는 떠나셨다. 하지만 내 마음에는, 그 꽃길을 천천히 걸어가시던 엄마의 발자국이 뚜렷하다. 나는 오래도록 그 발자국을 따를 것이다. 곧 꽃잎은 하염없이 흩날리겠지만, 엄마의 숨결은 여전히 내 삶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엄마의 씨앗이 내 안에서 꿈틀거린다. 어떤 꽃으로 오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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