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삼십 년 세월을 함께한, 나의 젊음을 기억하는,
콩닥거리던 아들의 숨결을 간직한,
키 크려고 줄넘기 천 번을 하던 딸의 소원을 품은,
우리 아파트가 좋다.
오래된 우리 아파트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앞 도랑이다.
새벽이나 늦은 밤에도 도랑을 따라 산책하기 좋다.
차량이 없는 그곳은 양옆으로 온통 꽃밭인 구간도 있고,
부추나 상추, 아욱, 호박, 옥수수 등을 심어놓은 구간도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우리 집 창문 너머로 보이는 꽃길은 정성이 가득 담긴 길이라 더욱 정감이 간다.
이른 봄, 산수유꽃이 피기 시작하면 앞다투어 개나리와 매화, 목련, 꽃잔디 등이 피어나고,
유채꽃이 모래톱까지 내려가 온통 노란 꽃밭을 펼쳐 놓으며 봄을 무르익게 한다.
이어 금계국이 봄날의 저녁까지 황홀하게 불을 밝히고,
인디언천국, 우단동자, 찔레장미, 나비바늘꽃, 수국, 코스모스 등이 계절을 따라 피고 진다.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것은 근처 교회의 목사님과 사모님이 살뜰히 가꾸시는 덕분이다.
이른 봄부터 씨를 뿌리고 가지를 치며, 풀을 뽑는다. 여름날 언덕배기에 엎드려 풀을 뽑고,
가랑비 내리는 날에는 코스모스 모종을 심는다. 겨울에도 풀들을 뽑고 정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두 분의 열정과 헌신이 인근 주민들에게 건강한 삶을 선사하는 셈이다.
또 이곳이 좋은 이유가 있다. 논밭을 구경하며 칠 분 정도만 더 걸어가면
‘평안숲’이라는 황토 맨발 걷기 장소가 나온다.
예전에는 아는 사람만 한 번씩 산책하던 작은 동산에 불과했지만,
몇 해 전부터 한 장로님이 그 길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매일 삽과 곡괭이를 들고 좁은 길을 넓히고, 숲속의 죽은 나무와 풀을 정리했으며,
메리골드와 허브를 심어 뱀의 출현을 막아냈다.
웅덩이를 만들어 물을 길어 붓고 소금을 넣어 건강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도 했다.
땅을 일구어 부추, 상추, 감자, 고추, 가지, 고구마 등을 심고 가꾸었다.
그곳을 찾는 환우들에게 신선한 것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지금은 신청자를 받아 함께 기르고 거두어들이는 공동체로 성장하여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그곳에 가면 때때로 증편이나 옥수수, 감자, 고구마 등을 나누고,
처음 보는 사람일지라도 산책하다 만나면 모두가 언니 동생이 된다.
아흔 살 어르신부터 대여섯 살 어린이까지, 공기를 즐기며 숲속 체험활동을 하는 공간도 있다.
수시로 소독약을 뿌리고 길을 정비하는 사람들이나, 떨어진 밤송이나 낙엽을 쓸어내는 사람,
돌부리를 캐내고 드러난 소나무 뿌리를 황토로 덮는 자원봉사자들도 만날 수 있다.
솔향을 맡으며 황톳길을 맨발로 걸으면 눈이 맑아지고, 머리도 상쾌해진다.
이제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맨발 걷기 길이 되었다. 이런 호사를 마다하고 이사 갈 용기가 없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근거리에 삼천천이 있어 가볍게 산책하기 좋다는 점이다.
흐르는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 신평교를 지나면 반딧불이도 볼 수 있는 청정지역이다.
갈퀴나물, 풍년초, 수선화, 마타리 등 여러 식물과 아까시나무, 황칠나무, 싸리나무, 느티나무들이 있다.
특히 봄에는 벚꽃이 터널을 이루어 장관이다.
그 길을 걷노라면 저절로 노래가 나올 정도다.
친자연적인 환경에 있는 우리 아파트는 1,580세대 대단지지만 조용한 편이고 목가적이다.
연륜을 느낄 수 있는 나무들이 많다.
쭉쭉 뻗은 삼나무가 아파트에 기대어 있고
감나무, 대추나무, 벚나무, 왕벚나무, 느티나무 들이 주변 환경과 어울리게 자라고 있다.
사계절을 만끽할 수 있는 놀이터에서 자유롭게 노는 아이들의 소리와
단지 내에서 산책하시는 어르신들의 느린 발걸음 소리가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까치, 직박구리, 멧비둘기 소리와 매미, 귀뚜라미 소리가 살아 있고,
개구리 울음소리도 자유롭게 넘나드는 곳이다.
차단기가 없어 출입이 자유롭고, 그래서 닫힌 마음과 다친 마음이 없는 아파트다.
사계절이 스며든 길 위에서, 삶의 온기와 사랑이 발걸음마다 피어나는 곳에서, 나는 생각한다.
진정한 천국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숨결과 손길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아파트 앞 도랑을 따라 걷는 발걸음마다,
꽃잎과 풀잎, 새들의 지저귐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섞여 내 마음에도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흘러가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오늘 내가 밟는 길이 내일의 추억이 됨을 깨닫는다.
천국은 완벽한 공간이나 먼 미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생각하고 돌보며, 작은 정성과 마음을 쏟는 순간,
이곳에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아파트의 길과 숲, 강물과 꽃길이 내 삶의 거울이 된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삶의 아름다움과 사람 사이의 온기를 느끼고,
내 마음에도 작은 천국이 자리 잡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아파트와 그 길 위에서
숨결과 손길이 만든 작은 천국을 느끼며 하루를 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