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본질

무너지는 자아의 지독한 독백

by 간극

우리는 기만(欺瞞) 위에 서 있다.


성인과 철학자의 문장을 수집하며

자신의 결함을 은폐한다.


서점에서 자기 계발서를 집어 드는 행위는

변화를 위한 결단이라기보다

조금 더 괜찮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구매’에 가깝다.


사실 그 책을 읽었는지,

그 철학을 체화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언가 노력하고 있다는 감각,

즉 나의 비루한 현상을 방어해 줄

지적인 알리바이다.


텅 빈 통장은

그 가짜 구원을 위해 지불한 입장료다.


우리는 싯다르타가 걸어간

고독한 길을 알고 있다.


융과 프로이트,

데넷과 이글먼 같은 이들이

그 길의 가능성을 설명해 줄 때면

우리는 마치 그 길의 끝에

이미 도달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이해는 구원이 아니다.


뇌과학으로 분노의 기제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당장 눈앞의 모욕 앞에서

초연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인이 걸어간 가시밭길의

‘풍경’만 감상할 뿐,

그 가시가 살을 파고드는

‘통증’까지는 상상하려 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이성적 주체를 자처하며 신을 부정하지만

동시에 이성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삶의 거대한 균열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그래서 삶이 절망의 임계점을 넘어

실존적 파산에 이르는 순간,

종교는 가장 세련된 도피처로

시야에 들어온다.


믿음은 논리적으로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기댈 곳 없는 자아의 심장으로

갑자기 점거해 들어온다.


여기서 기도의 지독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신이 공평하다면

묵묵히 고통을 견디는 자의 침묵에

먼저 응답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의 기도는

언제나 공평해 보이지 않는다.


난치병을 앓는 선인의 고요한 기도보다

손톱 밑에 가시가 박힌 자의 비명이

더 절실하게 우주를 때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기도는

도덕적 행위도

인과적 행위도 아니기 때문이다.


기도는 신에게 보내는 통신이 아니다.


그것은 무너지기 직전의 자아가

스스로를 붙잡기 위해 내지르는

마지막 비명이다.


외부의 신을 호출하는 형식을 빌려와

내부의 붕괴를 막아보려는

실존적 발악에 가깝다.


그래서 기도는 간청이 아니라

재건에 가깝다.


신이 듣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기도를 읊조리는 순간

흩어졌던 자아의 파편들이

다시 ‘간절함’이라는 하나의 축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기도의 본질은

신의 응답을 받아내는 데 있지 않다.


그 비명 같은 독백을 통해

나라는 존재의 마지막 경계선을

확인하는 데 있다.


우리는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의지해

다시 살아야 할 이유를

급조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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