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

기도의 그림자

by 간극

기도를 이해했다고 생각한 순간,

그 반대편에서 저주가 모습을 드러낸다.


기도는 빈다고 하고,

저주는 건다고 한다.


나는 그 사이를 오간다.

수많은 타인과 환경의 파편 속에서,

내 존재가 타당한지, 혹은 오류인지

끊임없이 되물으며.


오늘의 기도가

내일의 저주로 변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사랑으로 시작한 기도가

배신 하나에 증오로 뒤집히는 일은

너무도 쉽게 일어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나는 대가를 바라는 거래를 하고 있었던 걸까.


욕망 없이 기도는 가능했을까.


내 욕망을 가리기 위해

신을 끌어들인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 기도를 들어주는 신은

구원자인가, 아니면 공범인가.


결국 기도든 저주든,

운명이란 놈의 선택권을 없애 달라고

신에게 청탁하는 일은 아닌가.


선악과를 먹고 눈을 뜬 순간,

우리는 이해하게 되었고,

어쩌면 그때부터 저주가 시작된 건 아닐까.


축복은

이해 없이 바라보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


어쩌면 충만한 삶이란

저주할 사람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저주할 필요조차 사라진 상태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저주일까.


아니면

미래와 현재, 심지어 과거까지

모든 감각을 잃어버린 상태가

진짜 저주일까.


기도는 결국

나와 내 가족이라는 좁은 원으로 돌아온다.


그 원 안을 향한 저주는

결국 내 존재를 향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신을 부른다.


어리석어서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는 기만일까.


존재를 축복받았다는 말과

누군가를 저주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함께 놓여 있다.


그 저주는

주어진 축복을 거두어달라는

또 다른 기도일까.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사람이 있다는 건,

내가 필사적으로 살고 싶다는

비명 같은 기도일까.


아니면 그 존재를 지워서라도

내 삶을 지키려는 저주일까.


혹은 그 사이에 갇힌 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의 모순일까.


기도와 저주는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갈구하며,

지금과는 다른 자리에서

다른 모습의 나를 찾으려는

그 의지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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