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관람 사이에서, 슬픔이 고립되는 순간에 대하여
언제부터인가
기쁨은 공유가 되었고,
슬픔은 관리가 되었다.
슬픔을 드러내는 순간
그것이 약점으로 보일까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나는 문득
공포영화가 왜 재미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우리는 공포영화를 보며
두려워하고, 놀라고, 긴장한다.
하지만 끝까지 안전하다.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섭다고 말하지만
화면을 끄면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돌아간다.
공감은 하지만, 대신 맞아주지는 않는다.
그 고통은 스크린 안에 남는다.
슬픔도 그렇다.
타인은 나의 슬픔에 고개를 끄덕인다.
“힘들었겠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순간,
그들은 관객이 되고
나는 혼자 남은 주인공이 된다.
이때 슬픔은 두 번 작동한다.
한 번은
내가 직접 견뎌야 하는 고통으로,
또 한 번은
타인에게 ‘관람되는 감정’으로.
그 순간 우리는
두 번의 슬픔으로
외로움에 발을 들인다.
이미 슬픔의 버스에 올라탄 뒤다.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
외로움의 종착지로 강제된다.
슬픔을 겪는 사람은
공감 속에서 위로받는 게 아니라,
끝까지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역할을 떠안는다
반전 없는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그래서 슬픔은 혼자 버티다 보면,
끝에는 고독만 남는다.
공감은 나를 이해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건 네 이야기”라고
선을 긋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의 슬픔은
타인의 경험이 될 수 없고,
타인의 말로 대신 살아낼 수도 없다.
슬픔은
누군가와 나눌수록 가벼워지는 감정이 아니라,
끝까지 내가 견뎌야만 하는
지독한 개인사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나의 슬픔을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그 영화의 시작과 끝은
온전히 나여야 하기 때문이다.
관객을 들이지 않는 선택이
비겁함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방식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