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멍

의식이 물러날 때, 무의식이 숨을 쉰다

by 간극

불을 보고 있으면 생각이 멈춘다.

멈춘 건 머리인데, 이상하게 마음은 살아 있다.

우리는 그 현상을 불멍이라 부른다.


인간은 불에게

혜택과 공포를 동시에 받았다.

그리고 그 공포는 어릴 때 이미

우리 무의식의 저편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불은 가까이 가면 죽음에 닿고,

멀어지면 안전하고 생존에 유리해진다.

양날의 검 같은 존재다.


그런데 불멍이 시작되는 순간,

이 오래된 인식이 조용히 점화된다.


불은 위험하다.

하지만 지금 불과 나의 거리는 안전하다.

나는 살아 있다.


이 확신이 먼저 깔리면

무의식은 그제야 불을 오래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굳이 의식이 개입해

무의식의 유희를 단절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의식은

그저 불을 바라보게만 해준다.

판단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다만 시선을 유지한다.


그리고 멍함은

무의식의 영역이다.


나는 불멍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의식이 한 발 물러나

무의식이 제 속도로 회복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불은 타오르지만

사람은 무너지지 않는다.

위험을 바라보면서도

안전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서.


그래서 불멍은

‘멍’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다시 붙잡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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