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이 있었는데, 없습니다.

by 문득 달

이혼을 했기 때문이지요.


명절이다.

며느리들이 싫어하는 명절이다. (일반화의 오류입니다.)

나는 며느리일 때 싫어하지 않았던 명절이다.

정확히 얘기하면, 며느리들이 싫어하는 것은 명절이 아니라 시댁이다. (역시 일반화의 오류입니다.)


이름부터가 마음에 안 든다.

시댁(媤宅): 시집을 높여 부르는 말.

처가(妻家): 아내의 본가.

물론 처가댁도 있지만, 시가나 시가댁이라는 말은 없다. (있는데 안 쓰는 것일지도.)

보통 "명절에 시댁에 가."라고 하지, "명절에 시집에 가."라고 하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시댁은 높인다.


그런 말은 조부모를 일컫는 "친할머니/친할아버지-외할머니/외할아버지" 호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언어야 예부터 그렇게 썼으니, 그렇다 치고,

며느리들은 도대체 왜 시댁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누누이 얘기하지만 일반화의 오류입니다.)


나에게도 그런 시댁이 있었다.



나의 전 시댁은 조금 복잡한 관계도를 지녔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재혼을 하셨는데, 아버님과 전처 사이의 딸 둘(동생들), 어머님과 전남편 사이의 아들 하나. (이 아들 하나가 나의 전남편이었다.)

그리하여 어머님에게 나의 전남편은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두 딸도 어머님은 가슴으로 낳아 사랑으로 키우셨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머님 뱃속에서 태어난 아들(나의 전남편)만큼은 아니었다.


그 사랑이 며느리는 감사하기도 했고, 버겁기도 했다.


결혼 전 스튜디오 웨딩 사진을 보여 드렸을 때, 어머님 눈에는 온통 아들뿐이었다.

아무리 예쁜 드레스를 입고, 공주 같은 표정을 지어도, "우리 아들 훤칠하게 잘 생겼네. 사진 잘 나왔다~~"였다.

이때부터였을까?


결혼식 날 밤,

나와 전남편이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을 때,

어머님께서는 소주 한 병을 비우시고, 도둑 결혼하듯이 너무 후딱 가버렸다고 우셨다고 했다.

이때부터였을까?


결혼하고 시댁과 지척에 살아 주말이면 불려 가 저녁을 먹어도

평일에 전화하셔서 "아들 본 지가 백만 년이네~ 보고 싶어 죽겄다야~" 하셨다.

이때부터였을까?


나는 내가 그녀의 소중한 아들을 앗아간 것 같은 죄책감에 휩싸였다.


안다.

어머님께 전남편이 어떤 아들인지 알고 있다.

어머님께서는 이혼하시면서 아들을 못 데리고 나오셨다.

아들은 친할머니, 친아버지와 살았는데, 어느 날 아들이 중학교에 안 가고 싶다고, 아빠가 안 보내줄 것 같다고 해서,

그 길로 아들을 데리고 와 이런저런 일을 하시면서 아들을 키우셨다.


그 애틋한 마음, 모르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그건 그때의, 어머님의 마음이다.

이제 아들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나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만,

어머님의 모든 순간에,

아들은 여전히 애틋하기만 한 그 시절 아들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버거웠지만, 감사했다.


애틋한 아들 내외에게는

두 딸 몰래 반찬을 더 넣어 주셨다.


두 딸이나 사위가 좋아하는 음식은 자주 안 하셨지만,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은 자주 해 주셨다.


모두 가까이 살았던 덕에 누군가의 생신/생일 때마다 모여 축하 파티를 했다.

어머님 생신상을 차린 건 10년 결혼 생활 중 딱 두 번 뿐이었다.

직장 생활하는 며느리 바쁘다고, 그냥 밖에서 사 먹자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내 생일상은 항상 맛있는 고기반찬으로 차려 주셨었다.


며느리들은 명절에 시댁 가서 전 부치고 나물 무치고 정신없이 바쁘다는데,

아이 낳고 첫 명절, 아이가 전 부치는 매캐한 냄새에 자지러지게 우는 바람에,

아이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시댁 가기 전에 어머님께서 미리 다 전을 부쳐 놓으셨었다.

나는 가서 미리 만들어 놓으신 만두소를 넣고 만두만 빚고, 맛있게 먹고 웃고 놀다 오면 끝나는 명절이었다.


해마다 친정 김장철에는 가서 도와드렸는데,

시댁 김장은 어머님께서 평일에 다 해 놓으셔서 한 번도 도와드린 적이 없었다.


실내 인테리어 일을 하시는 시부모님 덕에 집수리며, 도배 등에 돈도 품도 들인 적이 없었다.

(물론 그 덕에 우리 집은 시부모님께서 조금 자주 드나드셨지만.)


반지하 신혼집에 살다가, 햇빛 드는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어

전남편과 상의는 했지만, 혼자 덜컥 부동산에 집을 내놓던 날,

전남편과 싸우고 어머님께 전화해서 울었다.

어머님은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애틋한 아들을 혼내셨다.

요즘 이런 집에서 살아주는 여자가 어디 있냐고, 잘하라고.


그리고는, 정작 혼내야 하는 때에 혼내지 않으셨다.

애틋한 아들, 잘못될까 봐.


아들 바람난 것 뻔히 아시면서

아들 얼굴이 많이 상했다고, 나한테 잘 좀 해 먹이라고 하셨다.


바람난 아들이 내연녀 만나러 가는 추석 연휴,

어머님은 며느리와 손녀 없이 혼자 집을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그렇게 안쓰러워 보이셨다고 하셨다.

그러니,

나보고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잘해 보면 안 되겠냐고 하셨다.


시댁 이야기를 쓰고 보니, 죄다 시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보통 며느리들에게 시댁 이야기의 9할은 시어머니 얘기가 아닐까 싶다.

딱히 눈에 띄는 고부갈등은 없었지만,

어머님 눈에도 내가 별로 예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내 앞에서 사위 험담을 하신 적이 있으신데,

나에 대한 험담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하시려나?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하긴, 나도 뭐, 이렇게 전 시어머니이지만 험담 및 미담을 나누고 있으니, 할 말은 없다.


그런데 어쩌면, 내가 이렇게 시어머니의 아들 사랑을 버거워하는 이유는,

전남편에게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 번째 바람이었을 때,

전남편은 내가 어머님께 하는 태도에 화가 나 있었고,

당시 1번 내연녀는 전남친 부모님에게 엄청 잘해서,

이 여자라면 우리 엄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했다.


아이를 낳고 복직을 하고,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시댁에 전화를 드렸고,

아이의 동영상 및 사진을 2-3일에 한 번꼴로 가족 단톡방에 업로드했고,

아이가 잠투정이 심해 좀 많이 울었던 탓에 자주 가지 못했고,

그래도 2주에 한 번 꼴로는 가서 저녁을 먹었고,

(휴직 기간 동안 일주일에 두세 번씩 오시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것에 대해 전남편도 눈치챈 듯했다.)

그때마다 저녁 식사 준비는 어머님 몫이었고,

애 키우고 일하느라 피곤하니 아이 잘 때 자라고 하셔서 시댁 가서 이불 깔고 편히 낮잠을 잤던 날 밤,

자고 일어나서 어머님 식사 준비 하시는데 리모컨을 돌린 죄로,

그날 밤, 전남편은 내게 이혼을 얘기했었다.


이러저러한 일들 끝에 바람이 난 것을 알고, 이혼을 엎고, 화해를 하던 날 밤,

전남편이 얘기했다.

"나는 솔직히 아이랑 너보다 우리 엄마가 더 소중하고 중요해."


전남편의 이런 마음을 알고나서부터는,

어머님께 내가 하는 수많은 '효'들이 가식이었다.

진심이었대도 가식으로 느껴졌다.

전남편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자주 전화를 드렸고, 통화를 길게 했고, 어머님과 나만 둘만 아는 비밀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머님의 건강을 걱정했고, 주말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머니 지겨우실 때까지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었다.


아이와 나보다 소중한 어머님을 위해.



그래서 나는 '시댁'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이 애틋한 모자 사이가 떠오른다.

버겁지만, 감사했던 사랑이 떠오른다.



곧 설이다.


결혼 10년 동안 명절을 비롯한 경조사가 치러졌던 나의 시댁은 이제

새 며느리의 시댁이 되었다.


전남편이 좋아했던 꼬지 냄새를 가득 풍기며, 시아버님께서 좋아하시는 만두를 빚느라, 분주할,

경기도의 빌라 3층.

저녁에는 모두 모여 자이글에 삼겹살을 구워 먹고, 김치 넣은 닭볶음탕을 먹고, 계속 먹고 먹고 먹으며, 왁자지껄할,

거실의 뜨끈한 바닥.

나의 전 시댁은,

그곳은 이제 새 며느리의 싹싹함과 새 아기의 웃음소리로 채워질 것이다.


아이가 7살 즈음부터 시댁은 강원도에 작은 집을 하나 지으셔서,

여름휴가, 명절 등을 그곳에서 보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우리는 마당에 모여 장작을 때고 불멍을 했다.

아이의 첫 캠핑이었다.

마당에 에어 수영장을 설치해 여름에는 물을 가득 채우고 아이와 함께 물놀이를 했다.

강원도 산골짜기,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아이와 함께 봤다.

엄마가 새 이불이나 다름없는 이불들을 잔뜩 싸서 가져오셨었다.

신혼 때 쓰던 책장들이 그곳에 있다.

아버님 심심할 때 들으시라고 스피커도 놓았었다.

주변의 맛있는 메밀전병집, 예쁜 카페들...

우리의 추억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곳을 새 며느리는 '별장'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그 '별장'의 마당 에어 수영장에서는 이제 그들의 아기가 헤엄쳐 놀 것이다.


미운 정, 고운 정, 들었던

버거웠지만 감사했던 나의 시댁 식구들은,

새 며느리의 시댁 식구가 되었다.


묘한 기분이다.


나만의 아무튼 돌싱은,

시댁이 있었다가 없어지는 것.

홀가분하면서도 허전한 기분이 드는, 참으로 요상한 것.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