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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달 Jul 19. 2024

전라도 할머니의 요리 부심

우리 엄마 자랑 겸 착한 딸은 그만하려 합니다 2

우리 엄마는 전라도 할머니이다.

서울 사는 동글이에게 전라도 할머니는 언제나 자랑이었다.

같이 살지 않을 때 할머니집에 가면 늘 상다리 부러지게 동글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 채워진 그야말로 잔칫상을 받으니 그럴 만했다.

동글이가 좋아하는 갈비찜, 잡채, 카레, 미역국 등등 끼니마다 각기 다른 음식들로 채워진 할머니 밥상은 배달 음식과 인스턴트 식단만 주는 엄마 밥상과는 차원이 달랐다.


전라도 할머니라고 다 요리를 잘하는 건 아니다.

엄마는 김치 축제에 나가서 1등 상을 받을 정도로 요리에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다.

그렇다고 자격증이 있거나, 음식점을 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엄마 때는 대부분 그랬겠지만, 큰삼촌 공부시키기 위해, 밭에 나가 일하는 외할머니를 대신해,

어릴 적부터 집안 식구들 밥은 엄마의 책임이었다고 했다.

엄마는 공부가 하고 싶었고, 엄마의 못 이룬 꿈을 나를 통해 이루려고 나를 공부시켰다.

공부시킨 엄마 덕에 나는 여자 최고의 일자리라 불리는(?) 교사 생활을 하고 있지만.

(지난 이야기에도 했듯 나는 진짜 진짜 공부하기가 싫었다.)

이야기가 옆길로 샜는데,

엄마는 어릴 적부터 요리를 해서인지 손맛이 좋았고, 뚝딱뚝딱 맛있게 이것저것 만들었고, 그 요리를 누군가 맛있게 먹는 것이 엄마의 낙인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엄마는 김장을 해도 이 집 저 집 나눠 먹는 것을 좋아했고, 작은 것들이라도 이 집 저 집 나눴다.

소풍날 김밥을 마는 날에는 엄마가 일하는 직장에 김밥을 몽땅 가져가기도 했고, 쑥이라도 캐는 날에는 쑥개떡을 쪄서 가져가기도 했고, 김장을 하는 날에는 우리 엄마 김치가 제일 맛있다고 직장에서 맨밥에 김치 올려 먹는다고도 했다.

엄마의 그런 베풂 덕에, 아빠 빨리 기운 차리시라고 여기저기서 보내 주시는 것들을 호사스럽게 함께 먹고 있다.


동글이 역시 할머니께서 해 주시는 반찬을 제일 잘 먹는데,

동글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1위는 할머니께서 구워주시는 장어,

2위는 할머니께서 끓여주시는 꽃게탕,

3위는 할머니께서 끓여주시는 미역국,

4위는 할머니께서 부쳐주시는 육전, 김치전이니 다 했다.


동글이는 밖에 나가서 김치를 잘 안 먹는다.

김치는 역시 전라도 김치라며 다른 채소는 안 좋아하는데, 오직 김치만은 잘 먹는다.



우리 엄마는 이 집 저 집에서 엄마 요리가, 엄마 김치가 제일 맛있다고, 손맛 좋기로 소문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인지, 요리 부심 또한 대단하다.

새로 한 반찬은 '이건 이렇게 이렇게 만들었는데 한번 먹어봐.'라고 해서 배부른 (전) 사위 젓가락 한번 더 닿게 만들었는데

사위가 잘 먹어서 싸 준 엄마의 반찬은 서울 집에 오면 사위가 잘 손대지 않았다.

(내가 내놓지 않는다고 했지만, 내놓으면 안 먹으니 안 내놓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장모님의 요리 부심을 알았던 사위의 예의가 아니었을까 한다.


한 번은 평창에 별장을 지으신 (전) 시부모님께서 여름휴가 겸 엄마아빠를 초대해 주신 적이 있어서 다 함께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우리 엄마의 요리 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엄마는 당시에도, 지금도 모르시겠지만.


사돈댁들 드시라고 반찬을 바리바리 싸 오셨는데,

복숭아 설탕 절임도 만들어 오시고, 여름 별미 열무김치며,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이것저것 있었다.

과일을 안 좋아하시는 (전) 시어머니는 복숭아 절임을 잘 안 드셨고, 엄마는 민망하게 자꾸만 권했던 기억이 난다.

거기서도 엄마는 이것저것 반찬에 대해 '이건 이렇게 만들었고, 이걸 넣어봤는데 맛이 더 좋네요. 한번 드셔보세요.'라며 이 반찬 저 반찬 권했다.

하이라이트는 두 분이서 부엌에서 요리를 하시는 부분이다.

거긴 분명 시어머니께서 부엌 안주인인 곳인데, 요리의 주도권은 엄마에게 있었다.

시어머니께서 뭐라도 넣으려고 하시면, 엄마는 "아니 잠깐만요." 하시면서 엄마가 다 하고, 시어머니는 거의 보조 수준의 그림이었다.

어찌나 민망했는지 엄마에게 뭐라고 하려다가도, 내가 지금 여기서 뭐라고 하면 민망한 분위기를 수습할 수 없을 것 같아 참았었다.

열심히 그릇만 나르고, 숟가락 젓가락만 놓았다.


요리 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엄마는 내가 하는 요리도, 사위가 해줬던 요리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전라도 할머니 특유의 솔직함으로 단칼에 "별로다." 하셨다.

내가 엄마한테 "엄마, 자꾸 그러면 아무것도 못 얻어먹어~~. 맛있다 맛있다 해야 다음에 또 해주지~~"

그래도 엄마는 "별로다." 한다.

내가 우리 엄마 며느리라면, 나는 마음의 상처를 백만 번쯤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올케가 그래서 언젠가부터 식사 대접을 안 하는 건지도. ㅎㅎ


아, 내가 하는 요리 중 유일하게 잘한다고 칭찬받은 건 '김치전'이다.

이것도 엄마의 김장 김치로 하는 요리이니, 엄마가 다 한 거다.

김치전은 김치만 맛있으면 장땡이니까.



이런 전라도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동글이도 나도 좋았다.

(사위도 좋아했다고 썼다가 지웠다. 좋아했을까? 모르겠다. 야식을 좋아하고 배달음식을 좋아하고 라면을 좋아했던 전남편은 엄마와 함께 살게 된 이후로 야식도, 배달음식도, 라면도 먹지 못했으니... 힘들었겠다.)


내가 요리를 하지 않아도 되서, 식사 준비 시간에 동글이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어서 여유로웠다.

반찬도 내가 하는 것보다 건강하고, 맛있고, 다채로웠다.

그런데, 사람이 참 간사하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내가 차려 먹다가, 갑자기 엄마가 차려 주는 밥상을 받는 호강을 하게 되었는데.

이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엄마는 손맛 좋은 전라도 할머니이지만,

아빠의 건강 악화로 건강 염려증이 생겨 진짜 진짜 진짜 건강한 밥상을 차려 주신다.

엄마가 해 주는 건강한 음식들만 차려진 밥상을 보면 가끔은 나도 숨이 막힐 때가 있다.

엄마는 '요리부심'이 있어서 '이것도 먹어봐라, 저것도 먹어봐라, 이건 이렇게 만들어 맛있고, 이건 이렇게 만들어 건강하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마치 젓가락을 갖다 대지 않으면 죄를 짓는 기분이라,

이것도, 저것도 다 잘 먹어야 한다.

어느 날은 '오늘은 스트레스 잔뜩 받았으니 치킨 시켜 먹어야지!'하고 오면 엄마는 이미 저녁 메뉴 선정을 끝내고 엄마 마음대로 요리 중인 날이 있었다.

착한 딸인 나는 그 건강한 음식들을 먹고,

초콜릿을 잔뜩 먹었다.


동글이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육아를 하며 동글이에게 주었던 아주 작은 선택권들 중에 하나는 저녁 메뉴에 대한 것이었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동글아 냉장고에 콩장, 김치, 콩나물, 돈가스, 멸치, 깍두기가 있는데 이 중에 무슨 반찬을 먹을래?"

"음, 엄마 나는 깍두기랑 돈가스랑 콩나물이요."

"동글아, 오늘 국은 미역국, 된장국, 콩나물국을 끓일 수 있는 재료가 있어. 무슨 국이 먹고 싶어?"

"오늘은 미역국!!"

이런 식이었다.

물론 매일 이런 것은 아니었고, 급하면 내 맘대로였지만.


그러니,  할머니 마음대로 나오는 밥상에 동글이는 더 반항심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동글이는 할머니 요리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하지만, 언젠가부터 동글이는 선택권을 잃어 슬픈 어린이처럼 보였다.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 개입된 시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지난 이야기에서처럼 나는 착한 딸을 벗어던지고, 요리부심 있는 엄마의 자존심에 스크래치 내며 동글이의 반찬 선택권을 존중해 달라 요청했다.

요즘 엄마는 나처럼 동글이에게 물어본다.

"동글아, 할머니가 저녁에 생선 구우려고 하는데, 동글이도 먹을래?"

내가 하겠다는데도 굳이 엄마는 엄마가 다 한다.

내 요리 솜씨를 믿지 못하는 거다.

게다가 내가 하면 햄, 소시지 등의 가공육이 들어간 요리를 하거나, (솔직히 소시지 야채볶음, 햄 들어간 오므라이스.. 이런 거 너무 맛있단 말이야.)

인스턴트로 나온 냉동식품을 돌려서 먹이니, 엄마 마음에는 영 들지 않는다.


그리고 가끔 동글이와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병원에 가고 안 계시는 때,

일탈을 한다.

햄버거, 피자, 떡볶이.. 이런 음식들을 시켜 먹는다.

둘이 키득거리며 배달시켜 먹는 이 일탈의 음식들이 꿀맛이다.


우리 엄마는 전라도 할머니이다.

그래서 손맛이 기가 막힌다.


그런데 가끔은, 작은 일탈이 주는 행복을, 동글이와 나는 놓치고 싶지 않다.


우리 건강한 음식도 잘 먹을게, 엄마.

그러니까 가끔은 좀 봐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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