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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달 Jul 12. 2024

착한 딸은 그만하려 합니다.

엄마, 미안해.

나는 착한 딸이다.

그러나 내 딸이 착한 딸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부터 나는 착한 딸은 그만하려 한다.


나는 성선설도 성악설도 아닌 성무선악설을 믿는 사람으로, 후천적인 영향에 의해 사람의 성격이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선천적인 기질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메타인지가 잘 발달한 내가 보는 나는

선천적으로 예민한 기질을 타고 나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사회화 과정에서 타인의 시선과 나의 시선을 조율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갔고,

마흔이 되어서야 타인 특히 가까운 타인의 눈치 보며 사는 건 나만 피곤하게 살아 병을 얻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가 편안한 것이 장땡이다'를 실천하려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다.

(기질은 바꿀 수 없는 것이므로 타인의 시선에 여전히 민감하여 민폐녀가 될 정도로 '나만 편하면 장땡이다'가 아닙니다.)


언제부터 착한 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선천적으로 예민한데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면 엄마의 시선에도 민감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돌 전까지는 미친 듯이 울어재끼는 극 예민한 아기였다고 한다.

아기들이 다 울지 뭐, 라고 가벼이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할머니는 내가 너무 울어서 큰 병이 있는 건 아닌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하고,

증조할아버지 장례식장에 나를 업고 간 엄마는 내가 너무 울어 쫓겨났다고 한다.

어찌나 울었는지 마흔이 된 지금도 친척분들은 나를 보면 내가 울어재낀 얘기만 하신다.

돌 즈음 홍역을 앓고 말을 좀 빨리 배워 의사 표현을 한 이후로는 미친 듯이 울어재끼는 일은 줄었지만 여전히 예민했다고 한다.


그런 내게 동생이 생겼는데, 이 동생이 어릴 때 많이 아팠다.

엄마는 동생을 업고 서울 큰 병원에 다니느라 힘들어했고,

나는 아마도 그런 엄마를 더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부모님 포함 모든 친척들이 내가 아기 때 울어서 엄마가 많이 힘들어했다는 얘기를 하니,

어느 정도 말귀를 알아듣고 나서는 나 때문에 엄마가 힘든 일은 없었으면 했다.

어릴 때 개구쟁이였던 동생은 여기저기 말썽을 피우고 다녔고,

다들 그렇듯 혼났다.

그래도 동생은 여기저기 매일매일 말썽을 피우고 다녔다.

엄마말 잘 듣는 나는 집에서 조용조용 놀았다.

엄마를 도와주려고 그릇을 옮기다 그릇을 깨는 일이 있었고,

다들 그렇듯 혼났고,

그릇 깨지는 것이 싫었던 엄마는 내게 그런 일들을 시키지 않았다.

엄마를 속상하게 하는 게 싫었으며 혼나기는 더더욱 싫었던 나는 엄마에게 혼날 짓은 가급적 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아픈 손가락이었던 동생은 공부를 소홀히 했고,

엄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공부를 하고 싶어 했던 건 아니었다.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는 그 시간이 지긋지긋했고, 머릿속에선 온갖 잡생각이 들었고,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었던 나는 문제가 잘 풀리지 않으면 짜증이 났다.

그래도 하기 싫다는 말은 못 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나는 착한 딸이었다.

다들 엄마 몰래 클럽도 다녀보고, 엄마 몰래 외박도 한다는데,

나는 남자친구랑 놀다가도 통금 시간 10시가 되면 집에 들어갔고,

장학금 받으려고 '집-도서관'이 주된 루트였고, 주로 저녁은 집에서 먹었다.

이런 대학생이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게 무슨 대학생인가 싶다.


결혼도 엄마의 제안이었다.

전남편을 사귀며 임용고시 준비 중이었는데,

엄마는 둘이 사귀다 덜컥 임신이라도 될까 봐, 어차피 둘이 결혼할 거 일찍 하면 좋겠다고 하셨고, 나의 임용고시에 방해되지 않게 서둘러 서둘러 식을 올렸다.

서두른 결혼이다 보니, 신혼살림도 대부분 전남편과 내가 아닌 엄마가 고른 것들이 많았다.

나 역시 이 사람과 언젠가는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엄마가 모든 것을 다 간섭하고 엄마 마음대로 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엄마 눈치를 보며 해도 될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을 구분했던 것뿐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원한건지, 엄마가 원한건지, 둘의 원함이 일치한 건지 모르게 인생을 살아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자취를 하며 나는 엄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엄마는 그간의 나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믿어도 될 딸이라 생각했는지,  

눈에서 멀어진 딸이 걱정은 될지언정 믿어 주었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는 전남편이 "그런 건 어머니께 먼저 여쭤봐야 되지 않을까?" 해서 전화를 해 물어보면

"뭐 그런 걸 다 물어본다냐, 니네 살림인데 니네가 알아서 해라~~"하실 정도였다.


엄마가 시키는 건 웬만하면 엄마 속상하지 않게 하고 싶어서 거절하지 못했던 나에게 문제가 생긴 건 전남편과의 관계에서였다.

사회화 과정을 통해 비즈니스적으로 얽힌 관계에서는 쓴소리도  하고, 거절도 정중하게 잘하는 편이다.

엄마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며 자란 나는 전남편에게도 그랬고, 지금은 아이에게 잔소리가 힘든 엄마가 되어 버렸다.

그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가 틀어질까 두려웠다.

그러니까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움받는 것이 싫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전남편과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니, 처음에는 내가 문제였다. (언젠가 다루게 될 이야기이니,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그러다 전남편이 첫 번째 외도를 했고, 이제 전남편은 내게 '당연한 존재'가 아니었다.

언제든 '이혼'을 말할 수 있는, 관계가 틀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 관계가 깨지는 것이 두려워, 아닌 것을 알면서도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고, 거절을 하지 못했고, 알면서도 참았다.


착한 딸이 착한 아내가 되었고 착한 엄마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아이 눈에 늘 착하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 엄마이다.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것이 엄마의 숙명이다.

내 딸이 나를 미워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잔소리를 똑바로 해야 내 딸이 올곧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착한 엄마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더더군다나  내 딸이 나처럼 착한 딸이 되어서 하기 싫은 것을 참으며 살다가

자신이 원한건지, 엄마가 원한건지 헷갈리는 삶을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딸을 착하게만 키우지 않기로 했다.





독립한 지 15년 만에 엄마와 다시 살게 되었다.

엄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가, 다시 엄마의 시선에 놓이게 되었다.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고, 본질은 그 엉뚱한 곳에서 드러났다.


부모의 이혼과 아픈 할아버지로 인한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안 그래도 변화에 민감한 동글이의 징징거림이 심해졌다.

동글이에게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표현하는 방법을 한참 훈육 중에, 동글이의 징징거림은 울음으로 커졌고, 가뜩이나 '울음소리'에 예민한 엄마와 아빠는 그만하라고 하셨다.

할머니들은 손녀가 울면 그만 울라고 달래는데, 나는 일단 울음이 멈출 때까지 기다려보는 스타일이다.

기다리기 힘들지만 어차피 울면 대화가 안 되니, 기다려본다.

그 시간이 너무나 힘들지만 해 본다.

그런데 엄마 아빠는 내가 울 때 그만 뚝 그치라고 했었기 때문에 그 기다리는 게 고통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출근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하고 가라는 둥, 애 울리면 성격 나빠진다는 둥 자꾸만 나의 훈육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

엄마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우는 애를 그만 울라고 달래도 봤고, 훈육을 멈추고 내가 방에 들어가 숨 고르기도 해 봤는데, 그러다가는 이도저도 안 되겠다 싶었다.

일관성 없는 것이 최악이다.

내가 애를 잡는 것도 아니고, 우는 거 기다렸다가 진정되면 얘기하는데, 그게 큰 문제는 아니지 않나 싶었다.

내가 착한 딸 그만해야, 내 딸이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잘 표현하여 올곧게 자라겠다 싶었다.

동글이는 다 울고 나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둘이 합의점을 찾는다.


그 훈육의 과정이 엄마 아빠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 나는 방에서 동글이와 둘이 얘기하는 합의점을 찾았다.


엄마는 가끔 내 옷차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신다.

초반에는 '아빠 때문에 속상한데 나까지 속상하게 할 순 없지'하며 옷을 엄마 스타일대로 바꿔 입고 나갔는데,

그러다 보니 내가 나이 마흔 먹고, 엄마한테 옷차림 지적을 받으며 엄마 스타일대로 옷을 입고 다녀야 하나 싶었다.

열 살 동글이도 옷은 계절에 맞게 본인이 골라 입고 나가는데 말이다.

나는 착한 딸을 그만하기로 했다.

그래서 하루는 "엄마, 내가 나이가 마흔인데, 아직까지 엄마가 입으라는 대로 입어야 해? 안 얼어 죽고, 안 떠죽게 입고 나가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해~"했다.


가끔 밤에 동글이를 재워 놓고 친구라도 만나러 나가면 "이 늦은 시각에 어딜 나가냐, 언제 들어올 거냐, 일찍 일찍 다녀라." 그런다.

엄마는 내가 들어올 때까지 안 주무시고 기다린다.

"하.. 엄마,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마흔인데, 9시 반에 친구 만나러도 못 나가? 12시 안에는 꼬박꼬박 들어오잖아~~" 했다.


거실에서 엄마, 아빠가 주무셔서 거실에 있는 티브이를 밤에는 못 본다.

엄마, 아빠, 동글이의 취침 시간은 9시 반.

처음에는 나도 그 시각에 잤는데, 잠을 많이 자서 개운하긴 했지만, 직장인들은 알지 않은가. 퇴근 후 그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

요즘은 방에서 핸드폰으로  OTT를 보거나, 맥주 한 캔 따서 책을 읽거나 하는데

그러면  "밤에 잠 안 자고 뭐 하냐, 이 밤에 그런 걸 먹고 그러냐."그러신다.

그래도 그냥 먹고, 그냥 본다.


엄마가 갈아 놓은 건강한 주스보다, 달달한 음료가 마시고 싶은 날에는 

꾸역꾸역 건강한 주스를 인상 쓰며 마시는 대신

"엄마, 주스 내일 마실게요."라고도 한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그동안 그렇게 힘들었냐 물으면, 그랬다.

힘들었다.

엄마가 속상할까 봐, 내가 사랑하는 전남편이 나를 싫어할까 봐, 내가 하기 싫은 것도 했고, 하고 싶은 것도 말 못 하고 참고 살았다.


이혼을 하고,

마흔이 되고,

알았다.


내 인생이다.

엄마 인생이 아니고, 전남편 인생이 아니고, 내 인생이다.

내가 편안한 것이 장땡이다.


동글이 인생이다.

내 인생이 아니고, 동글이 인생이다.

동글이가 자신의 인생에서 엄마 생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믿고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 '바비' 중

엄마, 미안해요.

나 이제 착한 딸 그만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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