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서 글쓰기

by 김인주

지리산에서 글쓰기


김인주


내 나이 50대 후반 정도 되어서야 지리산둘레길이라도 알게 되었다. 조선시대 김삿갓(김병연)은 22세에 강원도 영월 집을 나와 전국 방랑 걷기를 하다 57세에 화순군 동복에서 생을 마쳤으니, 감히 견줄 바는 아니지만 나는 매사가 늦다.

하동 산청 함양 남원 구례를 빙 둘러 이은 걷기 길이다.
지리智異 라는 뜻이 좋다. 지혜가 남다르다. 산이 그렇다 할 수 있고, 지리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할 수 있다. 그럼 나처럼 한 5년 정도 주말마다 샨언저리에서 하루 거한 사람도 지리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걸으면서 되돌아보아 반성도 하고 글도 쓰고 도사 같은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으니 지리의 근처에는 갔으리라 염원한다. 역시 세상에는 숨은 도사가 많다.

하동에 갔을 때 김삿갓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동복면에 들려서 전국을 떠돈 삿갓이 세 번씩이나 찾아온 이유와 그곳에서 생을 마친 이유를 살폈다. 외가 쪽 인척이 가까운 곳에 살았고,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기거할 곳을 내준 부자 인심이 있었다. 논밭이 있고 따뜻한 날씨의 변방이었으나, 결국은 사람이 사람을 부르고 머물게 하는 듯하다.

지리산둘레길 걷기에는 숲해설자, 나무, 마을 이야기 등 전문가들이 따랐다. 2016년에 만난 박 아무개 씨는 맨발에 검정 고무신 남루한 복장이었으나 마을의 역사 나무 곤충 야생화 등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보여, 내가 박박사라고 부르며 쫓아다니곤 했다. 그의 설명은 무심코 지나친 자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지리산 목련


산수유 매화 벚꽃이
산에 들에 봄소식을 전하나

목련꽃 피기 전엔
완연한 봄이라 할 수 없네

자색 분홍색 흰색이
고루고루 피어

꽃잎은 넉넉하게 고귀하고
시골집 담장 키높이 밖을 쳐다본다

고향 친구 한옥집 마당 한편에
목련은 누님 같은 자태로
누님 같은 향기 내음으로

동생 친구 밥 한 끼 먹고 가라는
푸근함이여
애절함이여
그리움이여



직장생활을 통해 쓰는 글은 상용문 기안서 품의서 보고서 형식의 간결체 건조체였으리라. 무엇보다도 상징성의 의미 모호함이 없는, 의미 전달의 명료성 효과성 간편성을 가장 우선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리산둘레길을 다닌 이후에 시 수준에 다다르지는 못해도 감성적인 글들이 써지기 시작했다. 그건 아마도 걸으면서 보고 느낀 나무 꽃바람 등 자연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의 덕이 아닌가 한다.



봄꽃


지지난주에는 매화꽃이 피었죠
홍매화도 피고요

지난주에는
붉은 열매를 뚫고 산수유꽃이 피었고

얼음 땅을 나온 복수꽃을 봤네요
복과 장수를 상징합니다

이번 주는 조팝나무에 새순이 돋아나요

다다음주 정도는 벚꽃이 피겠죠
그리고 봄맞이꽃도 채비를 합니다

봄꽃들도 위아래 앞뒤 순서가 있네요

바람은 꽃들의 전령입니다
바람이 부는 이유를 알았군요
꽃들도 시선을 보냅니다

봄바람을 타고 이미 산마루 산기슭을 떠나
우리 아파트 우리 동 계단 입구까지 와 있네요



지리산 남쪽에서 발원하여 꽃을 피우는 화개천에 세이암 洗耳岩 이 넓게 바닥을 이루어 발을 멈추게 한다. 잘 말하는 것보다 잘 듣는 것이 중요하리라. 잘 듣는 것보다 잘 선택해서 들어라겠지. 쉽게 남의 말에 현혹되지도 말고 멀리 하라를 이곳 세이암을 흐르는 물에 씻김 하라겠지. 알게 모르게 주워 들은 불필요한 이야기들이 있을 수 있으니, 여기 세이암에서 세이洗耳 하는 것이다.




화개천 세이암에 누워


물소리 듣는다
햇살에 부서진 물비늘이
바위 등에 붙어 흔들린다

물은 흘러가고 나는 남아 있다가
또 흘러간다
어제의 물이 아니듯 어제의 나도 아니다
늦여름 더위가 계곡 그늘에 와서
숨을 고른다

가파르게 치솟던 시간도
여기서는 돌에 기대어 식는다

꺾인 가지 끝에 작은 새순이 맺히듯
물러남은 사라짐이 아니라
몸을 낮춘 생의 윤회

인걸은 귀를 씻고 떠났다 하나
나는 가슴 깊은 곳
한때의 욕망이 지나간 자리까지
천천히 적셔 낸다

화개천 돌 위에 누운 채
흐르는 것을 섬진강으로 흘려보내며
마음을 씻고 또 씻을 일이다



나는 나의 시 같은 글을 감히 시 라고 하지 앓고 그냥 글이라 부른다. 시詩 란, 말言 로서 절寺 을 지울 수 있는 공덕을 쌓을 만큼 큰일이니, 쉽게 접하고 칭할 일이 아니다는 말을 어느 시인으로부터 듣는 순간 크게 깨달았다. 내 짧은 글은 자꾸 친절하게 쉽게 설명하려 든다. 그래서 늘 산문 설영문만 쓰인다.

마지막 짧은 글을 올린다. 둘레길은 총 22개 구간이고 총거리는 295km이다. 하나의 구갼이 대략 13km에서 17km 사이이다. 마을길 들길 논두렁길 산길 오르막길 내리막길을 대략 10시부터 걷기 시작하면 오후 4시경에는 목적지에 다을 수 있다.
22개 구간 중에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가탄에서 송정 구간이다.



지리산 가탄에서 송정


부처님 법아래 법하촌의
하동군 화개면
아름다운 여울 가탄에서
구례군 토지면 송정마을까지

일기예보대로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후드득후드득 산중의 고요함을 깬다
우비는 걸쳤어도 비에 젖고 땀에 젖고

삼도봉 작은재와
역사의 격랑 풍파를 안은
피밭골, 피아골 남단을 지나
다시 목아재를 넘는다
경상도를 지나 전라도를 넘나드는
보부상의 길이다

길은 숲 속 외길이라 운치와
푸르름을 만끽하는 풍광으로
가끔 지척의 발아래 나타나는
섬진강 구비는 무언의 탄식을 자아낸다

몸은 지쳐 천근 만근이라
어디든 주저앉고 널브러지고 싶은데
마음과 정신은 청결하고 영롱하고
비 오는 날 맑은 내에 씻김을 한듯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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