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에 잠식되지 않고 '좋은 사람'으로 남은 훌륭한 작가에 관한 영화
재밌게 본 영화, 드라마에 대해 질문 받으면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다르게 말하지만 오늘 기분 같아서는 "트럼보"를 꼽아야겠다.
벌써 10년도 넘은, 좀 오래된 시리즈이긴 하지만 Breaking Bad 만큼 쏙 빨리는 몰입감과 재미를 준 미드는 그리 많지 않다. 거기서 칼텍 출신의 온화하고 가족 밖에 모르는 순둥순둥 화학교사로 등장, 시즌이 거의 8개였는지 9개였는지 확실치는 않은데, 아무튼 끝날 때는 뉴멕시코 아니, 미국 최대 규모 마약제조자로 자신과 가족들, 주변 인물들까지 모두 다 나락으로 끌어가는, 절대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겼던 브라이언 크랜스턴이 각본가 제임스 달튼 트럼보 역이다.
헐리웃의 최전성기, 가장 몸값 높은 각본가 트럼보는 매카시 시절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 의해 사상검증을 강요당하자 위원회에서 원하는 대답방식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사를 자신의 방식으로 말한 것을 빌미로 고발 당하고 감옥에 수감된다. 출옥 후에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자신의 이름으로는 각본가로서 일할 수 없게 되자 가명과 차명으로 발표한 "브레이브 원", "로마의 휴일" 두 작품으로 오스카 수상. 미국이 광기에 지쳐갈 무렵 제작중이던 스파르타쿠스와 영광의 탈출은 그래도 그의 본명이 스크린에 오른다. 어떤 사람은 평생토록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뮤즈를 내리 연속 몇 번이나 불러오다니 참으로 엄청난 작가 아닌가. 자신의 연이은 성공이 이미 유명세를 얻은 작가로서의 이름 값인지, 진짜 작품이 재미있어서인지를 알고싶어 리처드 바크먼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작품도 성공하고서야 자신의 재능을 확신했다는 스티븐 킹의 일화도 달튼 트럼보에게는 비길 수준이 아니다.
우리 편 아니면 환영받지 못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밥줄을 끊어버리겠다는 서슬 퍼런 시기에도 자신의 양심도 지키고, 가족도 지키고, 자기 영역에서는 불멸의 업적을 쌓아올린 이 운 좋은 사람에게는 '운'만큼이나 중요한 무기가 더 있었는데 그런 억울하고 분한 시간을 살면서도 분노에 잠식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내적인 힘이 그것이다. 내적인 힘의 근간은 첫째는 재능, 다음은 매일을 살아가는 성실함과 책임감. 그리고 그 힘이 고사해 버리지 않게하는 것은 -굽히지 않는 남편을 비난하거나 채근 하지도 않았고 명성과 부가 사라졌다고 슬퍼하지도 않는-그의 비범한 아내(다이안 레인). 조금만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매번 그가 자기 마음에 흡족한 대작만 쓴건 아니었다. 원래 자신의 몸값에 훨씬 못미치는 단가 때문에 (많은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라) 다작을 해야만 해서 온갖 잡문도 마다치 않았고 B급 영화 제작사인 킹 브라더스 사장 프랭크 킹이 원하는 대중흥행공식에 맞춘 각본도 수없이 써야했다. 한때 최고 대우를 받던 스타작가였지만 바뀐 세상의 대우에 맞춰 '효율 좋은 각본 자판기'도 거부하지 않은 채 그 험한 시절에도 자기를 필요로 하는 비즈니스맨, 예술가들과 일한다. 변절했던 친구조차도 적이나 분노의 대상으로 돌리지는 않는다. 시대의 파도에 부서지지 않고 자신과 가족을 보전한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데, 그러면서도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훌륭하게 후세로 전할 도구와 플랫폼을 잃지 않았다는 점, 그러면서 의기양양하게 배신자들에게 언어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았던 것이 이 사람의 가장 멋진 점이다.
꽤 잘 만든 영화라 그 외의 재미 포인트도 많다. 우익 칼럼니스트라 쓰고 "세상 나쁜 년"으로 읽어야 하는 헤다 호퍼 역은 우아하기 이를 데 없는 헬렌 미렌이 했다. (여러모로 일본 극우파 여성언론인 사쿠라이 요시히코가 이 여자를 롤 모델로 삼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사상 따위 아무 상관 없고 심지어 애국자 '존 웨인' 팬이지만 자신의 비즈니스에 간섭하는 건 용서 못하는 마피아 출신으로 추정되는 영화사 사주 프랭크 킹역 존 굿맨도 갑갑하게 흐르던 이야기에 숨통을 틔운다.
"스파르타쿠스"가 빨갱이 작가의 손에서 만들어진 영화라고 좌표 찍는 헤다 호퍼 및 재향군인회의 시위에도 시대정신의 총아 케네디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영화를 지지해버리는 상황이 되자 길고 긴 사상통제와 블랙리스트의 시대가 종언을 고한다. 진짜 세상에서도 이런 완벽한 해피엔딩도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왜 인간은 극단의 자리에서 자신들이 증오해 마지 않는 자들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서로를 겨누는 것일까. 이승만의 정치적 아이덴티컬 트윈이 김일성이었던 것처럼.
ps. 영원할 것 같은 광기도 그 끝이 보이는 60년대, 케네디 정부 하에서도 반미활동조사위원회가 설친 기간이 꽤 이어졌던 것은 이 영화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케네디 시절에도 미시시피 버닝이 일어났고 매카시즘이 잔존 했고 베를린 장벽으로 새로운 냉전체제가 성립했다. 스푸트니크 충격에 미국은 달 착륙으로 성공적으로 응전 했고 쿠바의 절체절명 위기 앞에서 극적으로 타협을 하기도 했던 시대. 연도로 나열된 연대기로 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비해 우리가 아직도 이 시대를 자꾸 불러내어 곱씹을 만하다고 여기는 것은 그만큼의 풍성한 사고와 이벤트의 격돌, 그것도 지금 이시대의 기반을 만들어 낸 반석을 이루는 토대를 구축한 의미있는 사건들이 집중적으로 일어났던 시기이기 때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