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죽지 말자
대학원생으로 살기 시작한 지 10주 차가 되었을 무렵
드디어 처참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공부 안 한 척 족보를 숨기며 나에게 거짓말을 한 동기와 선배,
같은 연구실에 들어가자마자 등 돌린 연구실 선배 등등
이들의 존재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5월에도 또 한 번의 연구 발표가 있다.
4월부터 있었던 연구 주제를 정하고 발표하는 수업이
익숙해질 뻔한 무렵, 10주 차가 순식간에 지났다.
모욕감과 상처만 남겨놓고.
이번 주는 유독 힘들었다.
"이 주제가 ~연구인건 알지?"
그날, 교수님의 첫마디였다.
나의 발표가 시작되기도 전에 날아든 그 말은, 마치 싸늘한 공기처럼 내 마음을 얼렸다.
순간, 처음 가졌던 긴장감조차도 증발해 버렸다.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은 발표의 긴장감이 아니라, 교수님의 불쾌한 말투였다.
'제가 알고 있으니까 이걸 주제로 가져왔겠죠?'
속으로 대답을 했는데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나 걱정이 된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교수님은 나를 향해 계속해서 날 선 피드백을 던지기 시작하셨다.
"저 가설은 필요 없는 거야."
"너 000에 대해서는 알고 있니?"
피드백이라고 부르기엔 그건 너무도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밤을 새워가며 준비한 발표는 그 순간부터 무너졌고,
그 발표를 하고 있던 나의 마음도 함께 찢겨나갔다.
첫 수업 때부터 나에게만 예외 없이 날아들던 독설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만 대답하며 넘기려 했다.
이 말만 한 10번 넘게 한 것 같았다.
교수님이 같은 말만 10번 넘게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말 애써 준비한 발표를 마주한 자리에서
하필이면 동기들 앞에서 온갖 모진 말들이 퍼부어지니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적당히'라는 부탁을 외치고 싶었다.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준비를 해온 거겠죠.'
내 마음속의 대답은 이거 하나였다.
왜 자꾸 사람 기를 죽이는 걸까.
정말 열심히 준비해 간 발표 수업 중 동기들 앞에서
온갖 모진 말들을 듣다 보니 환멸이 나기 시작했다.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걸까.
내가 특출 나게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느 포인트에서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발표가 끝난 후, 선배와 동기들이 다가왔다.
“너 왜 이렇게 열심히 준비했어?”
그리고는 그들도 교수님이 심했다고 생각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들은 나에게 위로와 격려가 섞인 말들을 건넸다.
그렇지만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교수님이 나에게 던진 말들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그저 “그건 왜 한 거야”, “알고는 있니”
내가 네 자격이 되냐고 묻는 듯한 날 선 말들뿐이었다.
그 몇 마디가 내가 지난 4년 동안 대학에서 쌓아 올린 노력마저 무너뜨리는 듯했다.
내가 공부하고 깨지고 다시 일어나며 쌓았던 시간들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졌다.
'알긴 하니'로 일관된 피드백이었다.
말로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모욕적인 시간이었다.
여기서라도 억울함을 풀어보자면
나는 교수님이 질문한 내용 전부 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기에 흥미를 가진 것이고
흥미를 가졌기에 연구 주제로 정한 것이었다.
교수님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눈을 피하지도 않고 '피드백을 던졌던 그 표정이.
나는 이 밤에 문득 우리 지도 교수님이 보고 싶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봐 주시고 부족한 부분은 보듬어가며 채워주시는 분.
지금 이 순간, 지도 교수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절실하다.
하지만 지도교수님 면담은 다음 주라 기다려야 한다.
우리 지도 교수님한테 잘해야지.
이 글을 쓰는 오늘도 나는 발표 준비를 하고 있다.
또 발표 수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상처를 다 씻어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
아무도 모르게 부서졌지만,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다시 세우는 중이다.
어쩔 수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뛰쳐나오지 않는 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상처를 빨리 잊고 내가 할 일을 해내는 것뿐이다.
사람 쉽게 믿지 말고, 상처받는 말들은 필요한 것 빼고 흘려들을 것.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쓰지 말고
겉으로는 "예, 알겠습니다."로 일관하되
속으로는 필터링을 해서 듣도록 할 것.
10주차에 도달해서 내가 터득한 생존 전략이다.
내가 걸어가고자 하는 길 위에서 나는 나를 계속해서 지키고 싶다.
피드백은 피드백일 뿐,
나를 아프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무엇보다 대학원생은
따뜻한 인류애를 대학원 밖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