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는 집에 앉아 있다가 오후에는 근처 학교 운동장에 앉아 있다. 그녀를 보고 싶다면 우선 시계를 보고, 알맞은 장소로 가면 된다.
처음 한 달은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었다. 또 그 사람이네, 점심 먹고 운동장을 도는 팔짱 낀 두 소녀가 서로 속삭인다. 교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도 그녀 옆으로 올 때는 소리를 줄였다가 비껴가면 그녀에 관한 단촐한 대화를 나눈다.
그다음 일 년은 미친놈 취급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같은 곳에 앉아 있는 여자. 멀리 새를 한 번 봤다가, 철봉을 한 번 봤다가, 아이들을 보고, 다시 하늘을 보고. 허우대는 멀쩡한데 마땅히 하는 게 없다는 그 여자는 소문이 무성했다. 동네 유지에게 사생아가 하나 있는데 머리가 이상하다고, 결국 부모고 뭐고 다 포기했다더라 하는 식의.
그렇게 삼 년이 더 흘렀다. 사람들은 뭐든 금세 잊기 마련. 어느새 그 여자는 전봇대나 신호등 같은 거리의 구조물 취급쯤이 되었다. 저것도 업인 갑다, 하며 대수롭지 않은 시선들이다. 간간이 말을 걸어오는 당찬 신입생 몇과 걱정 뭍은 주름 사이로 아침 산책을 하던 할머니 하나가 전부.
그것조차 그녀가 뚱하게 단말마를 외치는 것을 끝으로 희박한 관심은 동이 났다. 마지막으로 동네 사람과 그녀가 2m 이내에 있던 것이 벌써 이 년 전. 신고받고 출동한 동네 보안관의 경고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나 이 동네 토박이오, 하는 마을 늙은이들도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그녀의 오전 생활.
*
사람들은 그녀가 혼자 사는 줄로만 안다. 미친 여자의 집 앞에 기웃거린 이가 여럿있었지만 별 소득이 없었으니까.
새벽 5시, 출근을 한다 해도 이른 시간에 퇴근을 하는 한 남자가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본 이는 거의 없다. 본다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 아파트에는 미친 여자가 살기 때문에.
그 여자는 도어락 키패드의 숫자가 하나하나씩 눌리는 소리를 들으며 움찔거렸다. 시계를 가만 본다. 시침은 정확히 '5'를 가리키고 있다. 눈을 도륵 굴린다. 구두주걱이 남자의 발을 조이고 있던 검은 구두를 벗겨낸다. 남자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온다. 발소리가 무겁다. 꼭 누군가 부러 뒤꿈치에 힘을 실어 걷는 듯하다.
여자는 천천히 다가간다. 남자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지나친다. 신발장으로 가 남자의 구두가 문을 바라보도록 정돈한다. 여자는 다시 돌아가 소파에 앉은 남자의 다리께에 조신하게 앉는다. 다리 모양도 제각각에 대충 걸터앉아 시간만 보내던 그 여자일까 과연.
남자가 벗은 겉옷을 받아 든다. 다림질을 해 모난 곳 없게 한다. 하루만 지나면 다시금 구겨질 옷이지만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열심이다. 혹여라도 옷감을 홀랑 태워 먹는 것이 걱정이었던 건지 손을 버들거리면서까지 조심스레 다린다.
"여보."
TV를 보던 남자가 운을 뗐다. 미친 여자가 "으응."하고 작게 대답했다. 퍽 고운 목소리다.
"나 회색 정장 입을 거라고 했잖아. 내가 여보 힘들 것 같아서 오늘은 그냥 입고 갔는데, 참…. 이런 식으로 하면 어쩔 거야, 응?"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게, 저, 요즈음 자꾸 물건이 사라져서…. 미안. 내가 어떻게든 준비해 둘게."
"됐어. 꼭 내가 강요한 것처럼 들리네. 대충 오늘 입은 거나 주워 입고 가면 되겠지."
여자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귀중품을 잃은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한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나부낀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그리고, 물건에 발이 달렸나, 혼자서 사라질 리가 있겠어? 분명 네가 칠칠치 못해서 또 잃어버린 거겠지. 핑계로 들려. 집안에서 정장을 잃어버리는 것도 재주다, 재주야."
그는 컴퓨터 개발자다. 프로그래머라고도 한다. 그래서인지 출근 시간이 불규칙적이고 남들이 자는 시간에 깨어있다. 퇴근 시간이 일정한 것이 의문이라면 의문. 직장 동료들은 1시, 2시에도 끝난다지만 남자는 항상 5시에 도착한다. 여자는 아마 남자가 아주 능력이 좋아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날도 미친 여자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오전 6시. 아직 남자가 잠자리에 들기 전이다.
정남향에 통창. 층고도 높아 채광이 좋은 곳이지만 7시까지 집안은 암실 상태. 거실 창문에도 커튼을 바리바리 쳐두고 빛이란 빛은 죄다 차단한다. 고등학생들이 이른 발걸음으로 등교할 무렵이면 32층에도 빛이 든다.
옷이라도 다릴까 싶어 다리미를 꺼내오려는데 다리미가 묘하게 손에서 겉돈다. 자세히 보니 원래 쓰던 다리미가 아니다. 여자의 눈이 조금 커진다.
"여보, 이리로 좀 와봐."
마침 남자가 여자를 부른다.
"이것 봐. 옷장 구석에 회색 정장 처박혀있잖아. 아무리 남편이 뭐로 보여도 이런 건 신경 좀 쓰지 그랬어? 다리미질 다시 해줄 수 있지? 당신은 다리미질 잘하잖아."
"아, 응…. 그래서 말인데, 다리미가 바뀐 것 같아. 내가 쓰던 게 아니야."
남자가 다리미를 들었다가 내리며 몇 번 돌려봤다. 남자가 혀를 끌끌 찬다.
"여보 왜 그래. 원래 쓰던 거 맞잖아. 내가 작년 결혼기념일 선물로 사줬을 때 좋다고 그랬던 건 언제고. 벌써 새로 사줘야 해?"
여자가 바로 도리질 쳤다. 자신이 또 실수했다고 여기는 눈치다.
*
퇴근하는 남편을 맞이하러 그녀가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 등에 반사되어 남자의 약지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가운데 다이아몬드가 박힌 백금 반지였다. 결혼반지가 사라져 가뜩이나 심란하던 차에 새로 터를 잡고 있는 반지를 보곤 그녀의 미간이 일순 구겨졌다.
"자기야, 그 반지…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섭하게시리. 이거 우리 결혼반지잖아.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예쁘다니까."
남자는 가볍게 대꾸하곤 얼어붙은 여자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여자의 뒤통수에 대고 나긋하게 말했다.
"지금 씻고 와."
미친 여자 옆에 남자가 한 이불을 덮고 돌아누워 있다. 그녀는 천장을 보고 있는데 검은 유리창 같은 것을 발견한다. 희미하게 붉은빛도 내고 있다. 여자가 급하게 남자를 부른다.
"…자기야, 저거 뭐야."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아, 저거? 그냥 카메라야."
'그냥' 카메라? 여자의 표정이 둔기로 맞은 후의 것처럼 변했다.
"설마 저거 가지고 지지부진하게 그러진 않겠지. 정나미 없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여보."
남자가 싸늘한 음성을 뱉었다. 그러나 이내 자상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알잖아. 나 당신 사랑해. 좋아서 그런 거야."
커다랗고 부드러운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쓸었다. 여자는 눈을 꼭 감고 남자를 마주 안았다.
"…알지. 자기가 날 얼마나 아끼는데."
*
창문 너머로 남자가 씩씩대고 그 옆으론 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미친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너 요즘 바람 피우니? 네가 다른 사람 만나는 것 같다는 소리를 내가 직장에서 들어야겠어?"
남자가 소리친다. 여자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니야. 내가 남자 만날 데가 어딨어. 오전엔 집에만 있고…."
"그래? 그럼, 여자는?"
"사람 자체를 안 만나."
"그러셔? 넌 항상 질질 흘리고 다니지. 백이면 백, 네가 문제야. 난 우리 사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 남들처럼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은 안 되는 거야? 내가 틀린 거야?"
"…미안해. 그래도 내가 '그때' 이후로 신경 많이 써. 약속한 거 한 번도 어긴 적 없어."
그의 입매가 굳는다.
"허! 다시 생각하니까 화나네. 그 새끼 그거, 남의 여자를 꼬셔서는…. 그래도 나만 한 남자 어디 가서 못 찾는다? 동거녀가 바람을 피웠는데 결혼을 결심하다니. 성인군자가 따로 없지."
*
6년 전의 이야기다.
미친 여자와 남자가 혼인신고는 하지 않고 동거만 할 때다. 그때도 오늘처럼 남자가 악을 쓰면서 들어왔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미친 여자-당시엔 미친 여자가 아닌 그저 여자였다-와 그녀의 친한 대학교 동기가 결혼을 했다는 거였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싶었으나 당사자 중 한 사람만 있어도 결혼할 수 있었으니 영 없는 소리도 아니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부인했으나 남자는 믿어주지 않았다. 애초에,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결혼을 남성 혼자서 할 수 있겠냐는 거였다. 최근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며 중얼거리던 그는, 울었다. 난생처음 보는 그의 눈물에 여자는 사과를 했다. 남자는 그럼에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영원을 약속했다.
그 후로 그녀는 친구를 잃고 남편을 얻었다. 그때도 여자는 친구가 거의 없어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었다. 남자에게 전해 듣기로는 증인란에 그 얼마 안 되는 남은 친구 둘의 도장 날인이 찍혀있었다고 했다.
그는 용서의 대가를 바랐다. 오전에는 집에만 있을 것, 자신이 없는 오후에는 밖에 나가도 좋으나 절대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말고 탁 트인 곳에 있을 것. 전부였다.
*
남자는 제 분을 못 이겨 집 안 가구들을 전부 세차게 쳐댔다. 식탁에 올려져 있는 액자가 진동 때문에 들썩거린다. 그러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 사진이 탁자 아래로 떨어진다. 곧 그것은 바닥에 부딪혔고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사방으로 조각나 깨졌다.
그는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여자는 파편들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맨손으로 주워 담으려다 결국 찔리고 말았다. 피가 맺힌다. 감정을 읽기 어려운 모호한 눈빛이다. 그러나 확실한 건 분명 좋지는 않다는 것이다.
*
남자는 어디로 가는 걸까.
집에서 40분가량, 회사에서 20분가량 떨어진 거리에는 허름한 상가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회색 벽면 빨간 페인트로 어설프게 칠해진 'X'자, 곳곳에 '임대'라고 적힌 현수막이 붙어있는데 그마저 빛이 바래 '이ㅐ'만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청테이프가 덕지덕지 발린 유리문을 당겼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광경은 고물 같은 것들이 산처럼 쌓여있던 것.
서류철 몇 뭉치와 흰 보석이 달린 얇은 반지 두 개, '거시경제학'이라 인쇄된 두꺼운 책 몇 권, 잘 다려진 셔츠, 나름 신식으로 보이는 다리미, 인감 네 개, 집 카드키, 핸드폰 셋, 심지어는 냉장고나 전구까지도.
그것은 매일 남자가 퇴근 후 차곡차곡 모으는 유산과도 같은 것이다. 그는 자주 대형 가전제품 매장을 들른다. 집에 있는 것과 언뜻 보면 유사하게 생겼으나 분명 다른 걸 산다. 그리고 항상 오후 시간대에 배송을 해달라는 요청 사항을 남겨둔다.
남자는 주변을 몇 번 두리번거리다가 더미를 헤집어 전구를 들어 올렸다.
*
'그 미친 여자는 꼭 사람 얼굴을 닮은 구름이 지나가면 옅게 웃는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소문의 출처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청년이나 수염 난 노인 모습의 구름을 보며 즐거워한다는 이야기만 구천을 떠돌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