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 유 Jun 16. 2022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감정들

그대들은 절대 경험할 수 없는 괴리감

글을 읽기에 앞서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 3악장을 꼭 들으면서 읽어주면 고맙겠다.


타인의 시선에 중독된 그대는 정작 그대 안의 내면을 치유한 적이 있는가?




타인이 보는 ‘나’는 부담스러워 : 남들이 보는 ‘나’ , 내가 아는 ‘나’는 너무 달라서


이 괴리감을 내가 채울 자신이 없어서 내가 나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정의하자면 겉보기엔 그럴싸한,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무엇을 위해 난 꽤나 괜찮아 보이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지는 -비가 올 듯 말 듯한- 하늘처럼 어렴풋이 알 거 같아.

아니지 -사실은 아는데 솔직하게 표현하기가 두렵다는 말-이 훨씬 더 타당하겠다.

무슨 일을 하던 나는 ‘어느 정도 적당히’는 잘하는 사람이었다. 딱 나의 밑천이 드러나기 직전만큼만. 물이 끓기 직전까지만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도, 혼자 생각을 할 때도, 출근을 해서도 선배들은 다들 ‘너 잘하고 있어, 너 정도 하는 애들 본 적이 없어’ 이러한 피드백들을 들을 때마다 두렵기도 했지만 뭐 어쩌겠어 이게 지금 나의 이미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난 그런 피드백을 받을 만큼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그저 단순한 ‘재미’ 수준으로만 일을 하고 싶었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걷잡을 수 없이 부담감만 증폭되었다.

‘이유’는 사칙연산만큼이나 간단했다. 언젠간 나의 지식과 실제 모습들이 탄로 날 거니까.

마치 이성 간의 대화에서 깊은 골로 한없이 빠져들 것만 같은 이야기들을  주고받다 마지막 가장 중요한 주제에서 닫힌 안전장치 같다랄까?

부끄러우니까.  옷을 다 벗기고 서 있을 거 같아서. 나의 19호실을 들키는 것만 같아서.

내가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이성 간의 대화에 비유하였지만 사실 이 ‘이성’은 내 안의 또 다른 자아를 말하기도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은 외로우며 고독하며 공허하다. 하지만 고독할 때 갈고 닦은 것들만이 나의 정말 소중한 것들로 남는다. 이 멈춰있는 듯한 시간 앞에 자기 자신을 앉히고 끝까지 꼬리의 꼬리를 물고 대화를 이어나간 사람만이 자신만의 주파수를 찾고 ‘나다움’을 표현할 수가 있다.
19호실을 공개할 때. 부끄러움과 부족함 나의 결함들이 드러날 때 오히려 신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위에 설명한 내용에 부합되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하며 느낀 점들을 활자로나마 남기고 싶었다.

적어도 나는 어디까지나 ‘살아가는 것’, ‘나다움’에 대해서 늘 질문하고 ‘이유’를 찾는 삶을 살아가려 한다

 





내가 제자리걸음인 진짜 ‘이유’ : 가장 무서운 생각 ‘적당함’ : 이 정도면 되겠지

<뭐든지 적당한 게 좋아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고>

많은 인간관계를 논할 때, 감정의 고민을 털어놓을 때.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야’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아닐까 싶다.

물론 맞는 말이다. 적당히 표현하고 적당히 주고, 받고 건배를 하다 부딪혀서 흘러넘치진 않게 그렇다고 부족하진 않게

그러나 나는 이 말속에는 생각의 결함이 있다.  ‘나 자신’에게까지 적당히 하면 안 된다는 거다.

물이 끓기까지는 시작점, 임계점, 끓는점이 있듯이 우리 -인생의 목차들 중 한 부분- 그러니까 쉽게 정의하자면 ‘현재 겪는 고난 또는 거슬리는 것들’의 순간이 있다

어떠한 일을 시작할 때 보통은 ‘재미’라는 궁금증을 갖고 일을 시작한다. 취미, 사람 또한 같은 맥락이다

‘재미’를 시작점으로 표현한다면 ‘적당함’은 임계점이다. 끓기 직전에 가장 성과가 더딘 구간.



나는 평소 러닝을 즐겨한다. 그럴싸해 보이기 위해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이키 러닝 클럽을 -리 그램 하여 즐기기(시작한 이유=재미)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러닝이란 단순히 ‘뛴다’라는 행동 그 이상의 것이라는 걸 느꼈다. 마치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쏟아지는 장대비를 홀로 맞는 듯한 기분이었다.

바로 ‘적당함’이다.

이 정도면 되겠지. 이 정도면 넘어가겠지. 이 정도면 괜찮아. 이 정도나 했는데?

보통 나는 컨디션, 일정에 최적화된 루틴들을 체화시키고 (루틴이란 건 주기적으로 깨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추후에도 꼭 다루고 싶은 이야기다.) 오늘도 나의 루틴에 알맞은 시간대에 러닝을 한다. 평소 퇴근 후 닭이 울기 직전의 시간이 되어서야 러닝을 하는데 10시간을 서서 일하며 출퇴근과 준비시간을 포함하면 활성화된 몸의 생채기는 그 이상이겠다. 거기에 늦은 새벽까지 일하고 퇴근하면, 밑창이 뜯긴 발바닥과 신발 만이 알아주는 고된 하루 속에 짧은 시간, 최대의 효율을 끌어내야 하는데 언제나 나는 ‘적당함’이라는 불편한 감정 앞에서 늘 이기고 있었다. 거리를 늘리 지도 속도를 높이지도 않고 그저 ‘적당히’ 뛰고 ‘적당히’ 걷다 집에 들어간다. ‘뛴다’라는 행위에 만족을 하는 것이 아닌 ‘오늘은 어떻게 뛸 것인가?’에 몰입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찌 보면 러닝을 하는데 무슨 그런 생각까지 해?라고 의문을 제기할 사람도 있을 거다. 내가 생각하는 러닝은 ‘단순히 뛴다’와 같이 손을 놓으면  가벼운 봄바람에 날아갈 정도의 의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두발에 의지하여 뛰는 것. 가장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동작 조차도 ‘적당함’이라는 파도가 나의 전신을 덮지 않도록 정신은 ‘더 빨리’를 외치며 발의 스텝은 억지로라도 빠르게 의식하며 숨 호흡 역시 발 박자에 맞춰 빠르게 나아간다. 발의 박자, 심호흡과 정신이 일치할 때야 말로 비로소 나는 ‘제대로 뛰고 있구나’를 온전히 느낀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3악장 클라이맥스와도 같은 합주가 이어진다.
이 느낌을, 이 호흡을, 이 순간을 단 1분여도 은행나무 향으로 가득 찬 이불속에 나의 피부를 감싸 안듯이, 공기가 내 온몸의 수액을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마치 고로쇠 물처럼 말이다. 나가는 작은 숨소리들을 깊게 키워 가고 싶다. 기척을 놓치지 않도록, 광경을 놓치지 않도록, 방향을 잃지 않도록 나는 나 자신의 신체를 향해 신경을 집중한다.




러닝도 인생도 우리 자신에게는 절대 ‘적당함’을 부여하면 안 된다. 결국 우리가 ‘제자리’라고 느끼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며 어쩌면 지금 스스로도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유-는 별 거 아니다. 적당히를 버리면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하루키의 책 구절 중 가장 좋아하는 구절로 나의 생각을 마무리하며 다음번에는 조금 더 솔직한 감정들로 인사드리고 싶은 바람이다. 예를 들면 ‘부끄러움’ ‘불안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과 함께 말이다.


‘나의 직업적 성과가 본인이 설정한 기준에 도달했는가 못했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며 그것은 간단하게 변명으로 통하는 일이 아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적당히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나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다 창작자에게 있어 동기는 자신 안에 조용히 확실하리 존재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형대나 기준을 찾아야 할 일은 아니다 어제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가는 것 그것이 더 즁요한 것이다 내가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신이다’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된 것들

하루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개리 비숍 : 시작의 기술

고독할 때 갈고닦은 감정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 3악장




작가의 이전글 르 라보를 좋아하는 사람은 대체로 특유의 매력이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