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시라는 결핍에 잠식되지 않는 법
결핍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라고 한다면 시작부터 이야기의 범위가 넓어지며, 편협하다 라고 느낄 수도 있을 거 같아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과시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다.
상황을 가정해보도록 하자.
요즘 뜨는 핫한 카페를 매주 휴무날이면 와서 커피를 마시고 자주 오다보니 직원들과 친해져서 오기만하면 약간의 서비스 할인과 디저트를 받는 사람과 그냥 인스타그램 피드에 한 번 남기기위해 온 사람을 비교했을 때. 과연 누가 인스타그램에 ‘ 나도 여기 드디어 왔다’ 라는 식의 피드와 사진을 주구장창 찍은 후 sns에 글을 남길까?
를 생각해본다면 웬만하다면 후자에 상황을 선택할 것이다.
과시와 결핍을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이런 ‘자랑하고 싶은 심리가 드는 이유’에서부터 파생된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단순화 시켜서.
정말 부유해서 매일 한끼를 미슐랭 파인다이닝에 가서 먹을 수 있는 사람과 한달 월급을 받아서 1주일치 식비를 한끼 식사에 기분을 내기위해 소비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더 인스타그램에 멋진 공간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먹은 음식들을 올릴까? 생각한다면 이 역시도 웬만하다면 후자의 상황을 선택할 것이다.
화려하고 누가봐도 멋진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과 그 순간을 어떻게든 붙잡고 짧은 순간에 최대한의 효율을 위해 소비하고 멋을 부리고 티를 내야하는 사람의 심리적 여유는 굳이 자로 재고 생각을 해볼 필요도 없이 바로 가늠이 될 것이다.
나도 한없이 자랑하고 티내고 멋있어보이고 힙한 것들은 다 해봐야 하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흔히들 ‘핫플, 인스타감성’ 이라고 자처하는 곳들을 시간이 나는 날이면 꼭 가야만, 그리고 갔다는 것을 마치 현대 사회 사람들은 하나의 챌린지를 하듯이 우후죽순 인스타 스토리와 피드로 남겨야만 하는 행동들을 나 역시도 안 한 것은 -물론- 아니다. 남들이 다 해보는 것은 나도 해야만 직성이 풀렸던 것인지? 나도 그렇게 선두주자인 것 처럼 마치 가장 감각적인 아티스트가 입었다 하면 빵 뜨는 브랜드처럼 나의 희소가치를 인정 받고 싶은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것인지? 이것도 아니라면 누군가가 ‘여기 어디죠?’ 라고 물어볼 때면 왠지 나만 아는 곳을 발견해서 콜롬버스가 북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거와 같이 새로운 핫플의 개척자가 된 듯해서? 아니면 빠르게 변해가는 정보화 사회에서 나도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함인지? 이런한 이유도 아니라면 ‘나’ 라는 사람을 세상에 표현할 수 있었던 방법이 이 뿐이어서였는지는 지금의 나로서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며 이제는 그랬던 시기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나의 내면에 확고한 믿음에서 오는 자신감이 아닌 우주의 한 먼지조각과도 같은 단순한 1차원 적인 숫자를 늘려보겠다면서 목숨을 걸고 해시태그를 적었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피드 한줄 맞추기, 톤 맞추기 등등 이런저런 신경을 써가며 소모했던 시간들이 있다.
물론 요즘이야 인스타그램도 하나의 포트폴리오가 되는 시대가 도래했기에 인스타그램을 잘 활용하여 협업도 하고 자신의 무드에 맞는 컨셉에 브랜드와 제품 제작도 하는 지인들을 보면 저렇게도 다양한 인프라를 구축할 있구나 . 라고 느끼며 존중하게 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부분들은 자신의 확고한 취향과 혹은 생각 가치관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그저 인스타 피드에 ‘잘 사는 것 같은 척’ 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도 이젠 진절머리가 나다 못해 환멸이 나려 하기 때문에 나만큼은 과시라는 결핍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나 스스로에게 채찍질도 하고 절제를 하며 깨달은 자존감과 내면의 풍요로움에 더 몰입 한다면 우리의 삶은 100%의 확률로 더 윤택해질 것이며 먼저 티 내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매력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 취향이 없는 사람들
| 10명 중 9명의 확률로 유행이 취향이 돼 버리는 시대
정확한 년도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남들의 시선이나 평판 보단 나의 감각과 생각을 중요시 했던 사람으로서 매우 자주 느끼게 되는 감정이지만
자기 자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 많은 경험과 실패, 복기, 발전으로 구축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생각과 판단이 아닌 주위 그럴싸한 사람들과 있어야만 자신감이 생기는 사람들, 좋아보이는 곳에 가서 꼭 잘 살고 있는 듯한 사진을 찍어야만 그제야 조금은 충전되는 듯한 자존감을 느끼겠지만 그것 조차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려는 행위와 다를 것은 없다는 걸 본인 스스로가 누구보다 더 잘 알것이다. 타인에게는 어느정도 속이고 적당히 꾸며 잘 살고 멋있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줄지는 몰라도 자기 자신의 내면에게는 그리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12센치도 안되는 아주 작은 네모난 상자에 갇혀 현실은 직시하지 못한채 과시라는 결핍에 잠식되어 영위하지도 못할 화려한 축제의 아주 짧은 순간들을 어떻게든 부둥켜 잡으려는 사람들
이쁜 사진을 건지기 위해 찾아다니는 인스타 핫플 찾는 사람들.
해시태그 카페 를 검색해보면 카페 사진보다 사람 사진이 더 많이 뜨는 현 시대의 문화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온몸을 파도에 맡기고 즐기는 것이 아닌 사진만 담아내기 바쁜 사람들
전시를 보는 것이 아닌 전시를 보는 본인의 모습을 담기 위해 가는 갤러리.
본인의 입맛보다도 ‘이쁘게 나오는 메뉴’를 먼저 찾는 사람들
이 음료가 만들어진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다도 사진에 담아내면 그만인 사람들
귀를 막고 눈만 열고 살아가는 것 같은 사람들.
자신의 입맛과 감각의 경험들보다 블로그의 리뷰가 척도가 되는사람들
문을 열고 들어온다. 휴대폰을 키고 주문은 뒷전이고 공간을 가장 먼저 찍는다. 방문을 했다면 적어도 한시간 정도는 충분히 앉아 있으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텐데 마치 안무라도 짠듯이 너도나도 할 거 없이 그냥 사진만 연신 찍어댄다.
주문을 하기도 전에 그냥 블로그 리뷰를 보며 주문을 하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기준은 사라지고 타인의 기준이 스며든다. 마치 방금 막 착즙한 레몬에서 새어나온 산이 병에 달라붙는 것 처럼.
음료가 나오면 사진을 다시 찍는다. 그리곤 약 5분에서 10분 가량 모두가 고개를 쳐박고 휴대폰을 보며 바로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업로드 하느라 보는 내가 목이 뻐근해질 정도다.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은 안무가 마무리된 후에 대화가 시작된다.
하나의 문화가 대중화되고 보편화 되면서 수요가 증가할수록 매니아들은 떠난다.
이런 문화는 미국에서 시작된 힙스터의 정의를 보고 생각을 유추해본다면 어느정도 이해가 된다.
미국에서 시작된 힙스터란 ‘유행 같은 대중의 큰 흐름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패션과 음악 문화를 좇는 부류를 이르는 말’ 이라고 정의 돼 있다. 그리고 근래 들어서 이렇게 정의 된 이유에 대하여 많이 느끼고 있다. 힙스터들은 본인들을 ‘힙’이란 하나의 단어로 속박시키고 싶어하지 않는다. 속박되는 순간 정의돼 버리기 때문이다.
과거 힙스터들은 이미 이런 미래를 예견 했던걸까. 본인들이 하는 새로운 문화, 신선한 활기를 가슴에 불어 넣어주는 것들, 남들은 하지 않던 ‘어딘가 모르게 저 사람은 왠지 특별해 보여’ 라는 생각을 주는 것들이 언젠간 유행이 되고 이는 곧 획일화가 되어 개인의 취향과 개성을 특징들을 모두 함몰 시킬 거라는 걸 예.측.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획일화는 곧 개인의 개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본인의 잘남을 티 내려는 과시가 되었고 이는 다시 곧 결핍이라는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하면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 되었다.
과시와 결핍은 병에서 새어 나온 산처럼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몸과 생각을 갉아먹고 녹여바린다. 그것은 날카로운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