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뿌리

by 안부시인 김선순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슬픔이 찾아온다. 그것은 예고 없이 찾아와 마음 한가운데를 파고들고, 때로는 숨조차 쉴 수 없게 만든다. 누군가는 그것을 잊으려 애쓰고, 누군가는 견디며 살아간다. 나 역시 오랫동안 슬픔을 지워야 할 감정이라 생각했다. 그저 지나가야 할 시간, 밀어내야 할 그림자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슬픔에도 뿌리가 있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 깊은 곳, 그 어둡고 습한 곳에 뿌리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자리를 잡는다. 보이지 않지만, 그 뿌리가 있기에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슬픔의 뿌리가 자라고, 그 뿌리 위로 우리의 하루와 감정이 자란다. 눈물과 상처, 그 모든 감정이 결국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슬픔이 깊을수록 마음의 뿌리도 단단해지는 법이다.


가끔은 부러진 가지처럼 꺾이고, 절망이라는 돌벽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삶은 그저 무너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부러진 가지의 상처가 아물고 그 자리에 새싹이 돋듯, 우리의 마음도 언젠가 다시 살아난다. 견디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다른 형태로 자라난다. 그렇게 피어난 한 줄기 희망은 무너짐을 통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빛이다.


나는 내 안의 슬픔을 오래도록 미워했다. 눈물은 약함의 표시이고, 상처는 부끄러운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슬픔이 나를 떠받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뿌리가 있었기에 내가 쓰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울음은 나를 지탱한 뿌리였고, 상처는 나를 단단하게 만든 줄기였다. 슬픔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지금의 나로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슬픔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사랑이 있다. 사랑이 깊었던 만큼 상실도 크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그가 떠난 자리가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슬픔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서야 비로소 슬픔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사랑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세월이 흘러 슬픔은 조금씩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처음엔 울음이었고, 나중엔 그리움이었으며, 지금은 조용한 미소로 남았다. 사람들은 슬픔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이제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더 이상 나를 짓누르는 존재가 아니라 삶을 향한 나의 자세가 되었다. 슬픔은 나를 낮추었고, 그 낮아진 마음 위로 사랑이 자랐다.


가끔은 여전히 불현듯 슬픔이 찾아온다. 잡초처럼 생명력 강하게 자라나 어느 날 불쑥 고개를 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억누르지 않고 바라본다. 잡초를 뽑는 대신 그 자리를 다듬듯, 그 슬픔의 뿌리까지 들여다본다. 그 안에는 아직도 내 어린 날의 나, 사랑을 잃고 울던 나, 그리고 다시 일어서던 내가 있다. 그 모두가 지금의 나를 이룬 한 줄기 뿌리다.


보이지 않는 뿌리 아래에서 오늘도 나는 살아간다. 슬픔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그것은 나의 깊이이며, 나의 생명이다. 세상에 슬픔 없는 삶은 없다. 다만 그 슬픔을 어떻게 품느냐에 따라 삶의 모양이 달라진다. 나는 이제 안다. 슬픔의 뿌리를 품은 사람만이 진정한 사랑과 연민을 피워낼 수 있다는 것을. 오늘도 그 뿌리 위에서, 나는 조용히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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