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드뷔시, 귀로 세상을 듣다
대학교에 다닐 때, 작곡가 선배와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었다. 그 선배는 피아니스트 백건우 선생님에 대한 신봉자였다. 늘 백건우 선생님의 드뷔시 피아노곡을 들려주며 백건우 선생님만의 해석을 나에게 신나게 설명하곤 했다. 그 때 처음 들었던 '달빛'은 지금까지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피아노곡 중 하나이다. 청명한 건반의 소리는 머리 속에서 달과 빛을 그리게 했고, 아련한 느낌의 숲과 안개를 눈 앞에 펼쳐지게 했다. 지금도 조성진, 임윤찬등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곡을 들으면 정말 아름다운 곡임에 틀림없다.
클로드 드뷔시는 흔히 ‘인상주의 음악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러나 이 명칭은 그를 이해하는 데 편리한 동시에 불충분하다. 드뷔시는 하나의 사조를 만든 작곡가라기보다, 음악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를 바꾼 인물에 가깝다. 그는 기존 음악이 전제로 삼아온 질서(조성, 진행, 목적지로서의 종지)를 해체하며, 소리가 머무르고 스며드는 새로운 시간의 감각을 제시했다.
19세기 말 유럽은 거대한 전환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산업화는 시간과 공간을 압축했고, 과학은 세계를 분석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었으며, 철학은 주체의 불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드뷔시는 베토벤 이후 이어진 ‘발전과 긴장, 해결’의 음악 문법이 더 이상 현대의 감각을 담아낼 수 없다고 느꼈다. 그의 음악은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머무르고 관조하는 방식을 택한다.
드뷔시의 화성은 기능을 상실한 화성이다. 화음은 다음 화음을 향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색채이자 상태가 된다. 온음음계, 교회선법, 병행화음 등은 모두 긴장과 해소의 서사를 약화시키며, 음악을 목적 없는 흐름으로 만든다. 이때 음악은 이야기가 아니라 풍경이 된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에서 우리는 사건을 듣지 않는다. 대신 빛, 공기, 미묘한 흔들림을 듣는다.
중요한 것은 드뷔시의 음악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모호함은 결핍이 아니라 의도된 선택이다. 그는 명확한 감정의 전달보다, 청자가 스스로 의미를 형성하도록 여백을 남긴다. 이는 인상파 화가들이 윤곽선을 지우고 빛의 인상을 남긴 방식과 닮아 있다. 드뷔시는 소리를 통해 ‘설명하지 않는 예술’의 가능성을 실험했다.
드뷔시는 또한 비서구적 음악에서 중요한 영감을 받았다.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접한 자바의 가믈란 음악은 그에게 결정적인 충격을 주었다. 반복적 리듬, 비기능적 음계, 순환적 시간 구조는 서구 음악이 전제로 해온 직선적 시간관을 상대화했다. 이는 드뷔시가 음악을 통해 암묵적으로 제안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시간은 반드시 앞으로만 흘러야 하는가?
그의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이러한 사유가 극적으로 구현된 작품이다. 이 오페라에는 전통적인 아리아도, 극적인 클라이맥스도 거의 없다. 대신 말과 말 사이, 소리와 침묵 사이에 감정이 머문다. 인물들은 행동하기보다 망설이고, 고백하기보다 암시한다. 이는 오페라를 ‘사건의 예술’에서 ‘내면의 기류를 듣는 예술’로 전환시킨 결정적 순간이었다.
드뷔시는 자신을 혁명가로 규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단지 “자연의 소리를 따르려 했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 결과는 혁명적이었다. 그의 음악 이후, 작곡가는 더 이상 질서를 완성하는 존재가 아니라, 감각의 조건을 재구성하는 사유자가 되었다. 라벨, 메시앙, 심지어 존 케이지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음악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드뷔시 이후의 질문 위에 서 있다.
드뷔시의 음악은 오늘날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속도와 효율, 명확한 메시지가 지배하는 시대 속에서 그의 음악은 우리에게 묻는다. “모든 것은 설명되어야 하는가?” 드뷔시는 소리를 통해 말한다. 이해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는 근대를 가장 섬세하게 진단한 작곡가이자, 침묵과 여백의 가치를 귀로 사유한 예술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