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씽엔, 말할 수 없게 된 음악이 모인 도시
필자는 독일에서 음악공부를 했다. 여러 대도시의 학교에서 낙방하고 아주 작은 시골의 한 학교에 합격했다. 처음 들어본 도시, 한인들이 거의 없는 도시, 바로 트로씽엔이다. 기숙사로 이사를 하며 처음 들어선 도시는 도시가 아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리'에 가까운 곳이었다. 낮임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차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시내라고 써있는 표지판을 보고 한바퀴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시내같아 보이지 않았다. 첫 느낌은 '아.....'였다. 마치 수도승이 되어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그 흔한 맥도날드도 없었다. 15분을 걸어 기숙사까지 가는 길은 암담해 보였지만, 그 길은 생각하는 길이 되었고, 덩그러니 서있는 기숙사는 오로지 음악만 생각하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차분한 학교 입구는 과거로 돌아가는 입구가 되고, 연습실은 역사를 체험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와 도시에 대한 이해가 쌓이면서 이곳은 다른 도시로 다가왔다.
트로씽엔은 관광 지도가 잘 펼쳐지지 않는 도시다. 독일을 떠올리면 흔히 연상되는 대성당이나 광장, 제국의 흔적은 이곳에 없다. 이 도시로 가려면 슈투트가르트까지 ICE(고속열차)를 타고 도착해서 지역열차로 갈아타고 다시 100년이 넘은 나무로 된 기차(지금은 운행안함)를 갈아탄다. 이렇게 쉽게 찾아 들어오기 힘든 곳이다. 기차역을 내려도 이 도시가 왜 존재하는지 바로 설명해주는 표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트로씽엔은 분명히 하나의 이유로 형성된 도시다. 이곳은 풍경이 아니라 음악으로 만들어진 도시다.
트로씽엔의 정체성은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도시는 호너(Hohner)라는 악기 제작사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하모니카라는 작고 값싼 악기는 궁정이나 대극장이 아닌, 노동자와 이민자, 생활의 현장에서 울렸다. 트로씽엔은 처음부터 엘리트 음악의 중심이 아니었다. 대신 이곳의 음악은 손에 쥘 수 있었고, 호흡과 반복 속에서 길러졌다. 이 출발점은 훗날 이 도시가 맡게 될 생활 속 예술의 역할을 예고하고 있었다.
1933년 히틀러의 집권 이후, 독일의 음악계는 급격히 변했다. 유대계 음악가와 교수들이 축출되었고, 현대음악과 실험적 음악은 ‘퇴폐 음악’이라는 이름 아래 배제되었다. 음악은 더 이상 예술의 문제가 아니라 이념의 문제가 되었다. 베를린, 뮌헨, 슈투트가르트 같은 대도시의 음악 기관들은 정치적 통제의 한복판에 놓였다. 대도시의 음악가들은 중심을 떠나 이곳으로 오게된다. 권력의 감시에서 벗어나고, 이미 호너(Honner)를 통해 음악의 문화가 자리잡았다는 조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이 도시는 음악은 말해질 수 있는 음악과,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된 음악으로 나뉜 시대를 품은 도시가 된다. 이 도시는 '도피처'가 아니라 '재구성의 공간'으로 진화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 음대가 지향한 것은 스타 연주자의 배출이 아니었다. 화려한 무대보다 중요한 것은 연습이었고, 결과보다 과정이 중시되었다. 트로씽엔에서 음악은 박수 속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긴 침묵과 반복, 교육의 시간 속에서 형성된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말할 수 없게 된 음악은 언제나 중심이 아닌 곳에서, 소리 낮은 방식으로 자신(음악)을 지켜왔다.
그래서 트로씽엔은 관광지가 되지 못했다. 이 도시는 보여주는 도시가 아니라, 들려야만 이해되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사진으로 남길 랜드마크 대신, 이곳에는 사라지지 않은 연습의 시간이 있다. 정치와 이념이 음악을 규정하려 했던 시대에, 트로씽엔은 음악이 스스로를 숨길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트로씽엔의 의미는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잊혀졌다는 것은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때로 잊힘은 생존의 다른 이름이다. 트로씽엔은 그 사실을, 큰 소리 없이 증명하는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