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음악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삶의 음악으로...

by Polymath Ryan


2025년 6월, 국립오페라단 정기공연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이 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되었다. 필자는 가서 관람은 못했지만 많은 음악가들은 매우 만족한 공연이라 입을 모았다. 이름만 알았던 작곡가와 처음 들어 본 오페라의 제목은 그와 그의 음악에 대해 알고자 하는 호기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이였고, 지금은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그는 음악에 특출한 재능을 어려서부터 보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하고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작품은 기존의 음악 범주를 벗어나며 당시 음악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그는 특히 오페라에 큰 관심을 가졌고, 여러 편의 오페라를 작곡한다. 앞서 언급한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은 그의 생전에 유일하게 성공을 거둔 오페라라고 한다. 이 오페라는 20세기의 오페라가 전통 오페라에 던진 '오페라는 꼭 진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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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그는 러시아를 떠나 음악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해외 생활은 어려웠고, 1936년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돌아온다. 이 후, 많은 작품을 선보이지만, 소련 정부는 그의 음악이 지나치게 거대하고 난잡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는 더욱 소련을 위한 작품을 위해 자아비판까지 하며 작품을 발표한다. 하지만 그는 스탈린이 사망(1953)하는 날, 사망하며 모차르트만큼 초라한 장례를 치르게 된다. 3년 후, 그는 사후 복권되어 가족들은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간다.


그는 가장 현대적인 작곡가이면서 동시에 가장 대중적인 선율을 쓴 사람이었고, 혁신적인 실험가이면서도 체제 안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현실주의자였다. 그의 음악은 언제나 두 개의 얼굴을 지녔다. 하나는 날카로운 아이러니와 공격성, 다른 하나는 놀라울 만큼 순수한 서정성이다. 이 이중성은 단순한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폭력적인 시대를 통과한 한 예술가의 생존 방식이었다. 초기 작품들은 종종 “무례하다”, “야만적이다”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의지가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낭만주의적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세기의 리듬과 에너지를 음악으로 만들고자 했다. 불협화음, 기계적 리듬, 과장된 아이러니는 그에게 단순한 실험이 아니라, 시대 감각의 표현이었다.


프로코피예프가 소련으로 돌아온 후, 그의 음악은 겉으로는 밝고 명료한 선율, 명확한 형식, 낙관적인 분위기를 띠지만, 그 이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과 냉소가 흐른다. 교향곡 5번은 작곡가 자신이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의 정신에 대한 찬가”라고 설명했지만, 많은 청자들은 그 밝음 속에서 오히려 억지로 유지되는 낙관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프로코피예프 음악의 아이러니다. 그는 체제가 요구한 언어로 말하면서도, 그 언어의 경쾌함 속에 설명할 수 없는 균열을 남겼다. 그의 이러한 특징은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프로코피예프는 사랑을 단순한 낭만이 아니라, 폭력적인 세계 속에서 가장 연약한 감정으로 그린다. 유명한 ‘기사들의 춤’은 위엄과 힘을 상징하지만, 그 힘은 곧바로 비극으로 이어진다. 이 음악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균형 위에 서 있다. 이는 단순한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아니라, 그의 삶을 그대로 담아놓은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은 오늘날 여전히 살아 있다. 비극적 아름다움, 교향곡과 피아노 소나타에 담긴 날카로운 에너지는 그가 단순한 체제의 예술가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그는 시대의 폭력에 굴복하지도, 완전히 맞서 싸우지도 못했다.


그는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에도 인간은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가의 질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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