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메타나, 민족의 정체성
베드르지흐 스메타나는 체코 음악사의 출발점에 서 있는 작곡가다. 그러나 그의 의미는 단순히 ‘민족주의 음악의 창시자’라는 역사적 표식에 머물지 않는다. 스메타나는 음악을 통해 한 민족이 잃어버린 언어와 기억을 다시 말하게 한 인물이었다. 그의 음악은 감정을 노래하기보다, 기억을 조직하는 방식에 가깝다.
19세기 당시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정치적 주권의 상실은 곧 문화적 침묵으로 이어졌다. 독일어가 공적 언어가 되었고, 체코어는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났다. 이 시기 예술은 단순한 미적 활동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우회적으로 발화하는 수단이 된다. 스메타나가 음악을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음악은 검열되지 않으면서도, 가장 깊은 층위의 기억을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프라하에서도 6월 혁명운동이 일어났고, 작곡가들은 군가나 용맹가 등 민족의식이 담긴 곡들을 작곡한다. 스메타나 역시 그 중 하나였다. 혁명의 실패로 스웨덴으로 건너가 음악학교를 세우고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체코의 민족운동이 되살아나나자 귀국하여 민족운동에 선두에 선다.
초기의 스메타나는 독일 음악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독일어를 사용했고, 음악적으로도 슈만과 리스트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1848년 유럽 전역을 휩쓴 혁명과 체코 민족운동은 그의 삶에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온다. 그는 “누구의 언어로 말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된다. 이때부터 스메타나는 체코어를 배우고, 체코의 역사와 전설, 민속 리듬을 음악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그의 민족주의는 감정적 충동이 아니라, 의식적인 선택의 결과였다.
스메타나의 삶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874년의 청각 상실이다. 그는 완전히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고, 이는 작곡가로서의 삶을 끝내는 선고처럼 보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은 이 침묵 이후에 탄생한다. 외부의 소리를 잃은 그는, 대신 내면의 시간과 집단의 기억을 더 선명하게 듣기 시작한다. 이 침묵은 개인의 고통을 넘어, 억눌린 민족의 침묵과 겹쳐진다.
이러한 사유가 집약된 작품이 바로 교향시 연작 '나의 조국'이다. 이 작품에서 음악은 자연 묘사를 넘어선다. 강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민족의 시간이 흐르는 경로가 된다. '몰다우'에서 강은 샘에서 시작해 도시와 들판을 지나며 역사를 품고 흐른다. 이는 개인의 삶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을 음악으로 그린 것이다. '비셰흐라드'와 '타보르'에서는 신화와 저항의 기억이 소리로 재구성된다. 여기서 음악은 감상 대상이 아니라, 집단 정체성의 구조물이 된다.
'나의 조국'을 작곡한 후,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프라하에서 은퇴한다. 말년에는 정신착란 증세가 나타나, 1884년 프라하의 정신병원에서 사망한다.
철학적으로 볼 때, 스메타나의 음악은 낭만주의적 주관성을 넘어서 있다. 그의 관심은 ‘나의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에 있다. 이는 근대 이후 개인 중심으로 이동한 예술의 흐름 속에서 보기 드문 태도다. 그는 예술가를 고독한 천재로 세우기보다, 기억의 매개자로 위치시킨다. 이 점에서 스메타나는 음악가이면서 동시에 역사가이자 사상가다.
스메타나는 말한다. 조국은 땅이나 국경이 아니라, 기억 속에 존재한다고. 그리고 그 기억이 사라질 때, 민족도 사라진다고. 그의 음악은 위로를 주기보다, 기억하라고 요구한다. 그것이 스메타나 음악의 긴장감이며, 오늘날까지도 살아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