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를 운영하는 중년의 이민자 여성 에블린(양자경)은 세무조사를 받고, 남편은 이혼을 요구하고, 딸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삶은 엉망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깨닫는다. 이 우주 말고도 수천, 수만 개의 우주가 있으며, 각각의 우주에서 자신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영화배우가 된 에블린, 무술의 달인이 된 에블린, 핫도그 손가락을 가진 에블린. 그 모든 에블린이 동시에 존재한다.
2022년 개봉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황당하고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영화다. B급 유머와 액션과 눈물이 뒤섞인다. 하지만 그 혼돈의 중심에 아주 진지한 질문이 있다. 우리는 왜 이 삶을 살고 있는가. 선택하지 않은 삶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그 모든 가능성 앞에서,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
선택하지 않은 삶
영화의 핵심은 멀티버스라는 개념이 아니다. 멀티버스는 질문을 던지기 위한 장치다. 그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지금의 삶을 선택했는가. 아니면 그냥 그렇게 됐는가.
에블린은 젊은 시절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왔다. 웨이먼드와 결혼했고, 세탁소를 차렸고, 딸을 낳았고,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멀티버스가 열리면서 그녀는 본다. 웨이먼드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영화배우로, 무술가로, 요리사로 살았을 수많은 에블린들을. 그 장면들이 아름다울수록, 지금의 삶이 더 초라하게 느껴진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선택의 기로에서 한 방향을 택할 때마다, 나머지 방향의 삶은 사라진다. 가지 않은 길, 하지 않은 고백, 포기한 꿈. 그것들이 다른 우주에서 살아있다고 상상한다면 — 지금의 나는 얼마나 작은 가능성 하나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인가. 영화는 그 아찔한 감각을 정면으로 들이민다.
허무주의라는 적
영화의 진짜 적은 빌런이 아니다. 딸 조이가 빠져든 허무주의다. 조이는 깨달았다. 무한한 우주에서 우리의 선택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어떤 삶을 살아도 결국 사라지고, 어떤 것을 해도 결국 무의미하다고. 그래서 그녀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 한다. 의미 없는 것들을 차라리 끝내버리겠다고.
이 허무주의는 낯설지 않다. 우주의 크기 앞에서, 역사의 흐름 앞에서, 결국 사라질 모든 것 앞에서 — 우리는 종종 이 감각에 사로잡힌다. 내가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작은 삶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조이의 허무주의는 극단적으로 표현됐지만, 그 뿌리는 우리 안에도 있다.
에블린은 딸을 구하기 위해 그 허무주의 안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같은 것을 본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에블린의 결론은 다르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허무주의를 통과해서 나온 자유. 이것이 영화가 실존주의 철학과 만나는 지점이다.
돌멩이 두 개의 철학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돌멩이 두 개가 나란히 놓인 장면이다. 핫도그 손가락을 가진 우주, 즉 인간이 아무것도 만들지 못한 우주에서 에블린과 조이는 돌멩이가 됐다. 손도 없고, 감정도 없고, 세금 신고도 없고, 이혼도 없는 세계. 그 침묵 속에서 두 돌멩이가 나란히 놓여 있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 마음을 건드린다. 모든 것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복잡한 인간 관계, 상처, 기대, 오해를 다 걷어내면 — 그 밑에 무언가가 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 에블린과 조이가 돌멩이로 나란히 있는 그 장면은, 말이 없어도 연결되는 무언가를 보여준다. 어쩌면 그것이 사랑의 가장 단순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왜 한국에서 울었는가
이 영화가 한국에서 유독 반응이 좋았던 데는 이유가 있다. 이민자 가족 이야기여서만이 아니다. 에블린과 조이의 관계가 한국의 많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기대가 크고, 말이 서툴고, 상처를 주면서도 사랑하고, 결국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평행선을 달리는 관계.
에블린은 딸에게 자꾸 상처를 준다. 의도하지 않지만 준다. 딸이 원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딸의 모습만 본다. 조이는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지만, 그 방식으로는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이 간극이 영화 내내 고통스럽게 펼쳐진다. 그리고 결국 에블린이 달라진다. 딸을 고치려 하지 않고, 딸이 있는 그 자리로 간다.
그 순간이 많은 관객을 울렸다. 이해받고 싶었던 기억, 이해하지 못했던 기억, 그리고 여전히 진행 중인 그 간극. 영화는 멀티버스라는 황당한 설정 안에서, 가장 오래된 인간의 이야기를 했다.
지금 이 삶으로 충분한가
영화가 끝나면 에블린은 여전히 세탁소를 운영한다. 세무조사도 계속된다.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에블린은 달라졌다. 수천 개의 우주를 경험하고 돌아온 그녀는, 이 초라해 보이는 삶을 다르게 본다. 선택하지 않은 삶들이 더 화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삶들 속에는 지금 이 사람들이 없었다. 웨이먼드가 없었고, 조이가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 메시지는 이것이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지금 이 순간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허무를 통과해서 나온 사랑. 의미 없음을 알면서도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일이다.
모든 것, 모든 곳, 한꺼번에 — 그 압도적인 가능성들 앞에서, 우리는 결국 지금 이 자리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이, 어쩌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