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선과 가까운 접경지 마을 파주 눌노리. 이 조용한 농촌 마을에 세계 각지에서 청년들이 찾아와 함께 농사짓고 밥을 해 먹으며 머무는 공간이 있다. 사단법인 ‘평화마을짓자’ 공동체밭과 생태거점 농장이다. 이곳의 호스트는 37년간 서울에서 도덕 교사로 살다 은퇴한 정진화 이사장. 그는 지금 농사와 공동체, 그리고 평화를 잇는 또 하나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정진화 호스트가 평화마을 구상을 시작한 것은 2017년. 보리출판사 윤구병 대표, 쌈지농부 천호균 대표 등과 함께 “접경지역에서 평화를 일상으로 만들 수 없을까”를 고민하던 자리에서였다. 이듬해 파주 적성면 식현리 하천 인접지 1,000평을 빌려 유기순환 농사를 시작했고, 2020년 8월에는 사단법인 ‘평화마을짓자’를 창립했다.
처음에는 접경지 군부대를 리모델링해 예술가와 귀농귀촌 희망자가 함께 사는 평화마을을 만들자는 구상도 있었다. 비어 있는 군부대에 사람들이 살며 농사를 짓고, 공연을 열고, 공방과 마을 카페를 운영하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국방부 국유지 활용 문제에 가로막혔다. 대신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자”는 결론으로, 파평면 눌노리에서 소규모 시범 마을 만들기에 들어갔다.
평화마을 공동체밭의 농법은 퍼머컬처다. 농약, 제초제, 비닐, 경운기를 쓰지 않는다. 삽과 호미, 낫으로 흙을 다루고, 잡초와 부산물은 모두 퇴비로 되돌린다. 단작 대신 혼작과 돌려짓기를 기본으로 한다.
정 호스트는 퍼머컬처를 단순한 농법이 아니라 ‘땅과 관계 맺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허브 50여 종이 자라는 밭 한가운데에는 나비와 벌, 새들이 모여든다. 멧돼지가 자주 내려오자 고랑 사이에 향이 강한 식물을 심어 접근을 줄였다. 화학적 방제가 아니라 생태적 회피다.
공동체밭의 원칙은 단순하다. 공동경작, 공동분배형식이며, 형편껏 회비를 내고 누구나 밭일에 참여할 수 있다. 수확물은 참여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다. 정 이사장은 “팔기 위한 농사 이전에, 자급이 먼저”라고 말한다.
정 이사장이 우프(WWOOF) 호스트가 된 것은 2022년. “이제는 세계 청년들과 함께 살아보고 싶었다”는 것이 계기였다. 첫해부터 일본, 덴마크, 오스트리아, 뉴질랜드 등지에서 우퍼들이 찾아왔다. 대부분 7~10일에서 길게는 한 달 이상 머물며 밭일을 돕고, 함께 밥을 해 먹고, 마을을 둘러본다. 하루 노동 시간은 4~6시간 정도. 여름에는 더위를 피해 새벽에 일한다.
정 이사장은 모든 우퍼를 임진각으로 데려간다. 해설사와 함께 분단 이야기를 듣고 천천히 걷는다. “한국 농촌 체험이 아니라, 한반도 체험까지 포함된 우프”라는 설명이다.
덴마크에서 온 한 우퍼는 곤돌라를 타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일본 여성 우퍼 요코는 함께 음식을 만들며 마을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이곳에서의 체류는 농사 체험이면서 동시에 작은 국제 교류다.
평화마을 밭은 치유농장에 가깝다. 된장·간장 만들기, 꽃차, 소리 명상, 문학 콘서트, 작은 전시와 공연이 이어진다. 공식은 하나다. 1+1=하나. 함께하면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현재 사단법인 회원은 약 140명. 이 가운데 16명은 눌노리에 집을 짓고 살 준비를 하고 있다. 생태건축가와 함께 마스터플랜을 그리고, 길과 공용 공간, 각자 주택의 형태를 논의 중이다. 정진화 호스트는 에너지 자립 마을, 음식물 쓰레기 없는 마을, 빗물 순환 시스템, 지열·태양광 온실 등을 준비하고, 실행하고 있다.
올해 목표도 단순하다. 밭을 더 아름답게 가꾸고, 더 다양한 생명이 살게 만드는 것.
접경지 눌노리의 저녁 무렵, 밭을 정리하던 우퍼들과 마을 사람들이 긴 테이블에 둘러앉아 밥을 나눈다. 그 풍경이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마을은 이미 충분히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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