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췄던 감정, 지금 업로드 중
달 : 둘이 같이 오는 건 처음이지. 문 열릴 때 공기가 조금 다르더라.
단비 : 나 혼자 왔던 적은 있는데, 같이 오는 건 처음이야.
서후 : 단비가 가보자고 해서 그냥 온 거야.
달 : 잘 왔어. 오늘의 차는 따로 준비했어, 단비는 레몬그라스, 서후는 로즈마리. 향이 다르면 마음이 반응하는 결도 달라지거든.
단비 : 향 맡자마자 심장이 확 꺼졌어. 그냥… 날카롭고 서늘해. 지금 딱 내 기분 같아.
서후 : 난 잘 모르겠는데. 차는 괜찮네.
달 : 레몬그라스는 답답한 마음을 슬쩍 밀어내고, 로즈마리는 생각이 너무 엉켜 있을 때 방향을 잡아줘. 향이 먼저 손 내밀 때도 있어.
단비 : 요즘엔 속이 너무 복잡해서 무거워. 근데 꺼내려 하면 더 얽히는 기분이야. 처음 왔을 땐 내가 예민한 줄 알았거든. 근데… 지금은 확실해. 나, 너무 오래 참고 있었어.
서후 : 또 시작이야?
단비 : 시작? 시작도 안 했어. 난 그냥 대화하고 싶었어, 근데 저녁 먹을 때도 휴대폰만 보는 사람한테… 하루 종일 말 한마디 붙이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달 : …
단비 : 오늘 아침에도 그랬어. 애기 옷 챙기고, 우는 거 달래느라 바쁜데, 너는 눈도 안 마주치더라. 내가 무슨 배경음이야? 너 삶의?
서후 : 피곤해서 그랬어.
단비 : 그 말, 몇 번째인지 몰라 , 너 피곤한 동안 나는 무슨 상태였는지 궁금하긴 해?
서후 : 후~
달: 워~두분 릭렉스,,, 지금 이 감정들을 꺼내줘서 고마워. 감정은 흐르지 않으면 멈추는 게 아니라, 더 굳어지니까.
단비 : 나 요즘 감정이 굳는 게 아니라 썩는 기분이야. 그냥 말라붙은 감정 덩어리 같아. 그래서인지 오늘 향도 유난히 따갑게 느껴지더라.
달 : 혹시 지금 그 느낌이랑 닿는 카드가 있다면, 세 장만 골라줄래? 손이 가는 대로. 지금은 향이 먼저 마음을 기억해 줄지도 몰라.
단비 : 이 세 장이 눈에 계속 들어와. 이유는 모르겠는데 손이 멈추질 않았어.
달 : 첫 번째 카드는 블랙페퍼야. 겉으론 괜찮아 보여도, 속은 점점 타들어가는 향이지. 너무 오래 책임을 끌어안으면, 감정이 피로보다 더 무거워져.
단비 : 나 혼자만 책임을 다 지는 기분이야. 처음엔 결혼도 내 일도 내가 선택했으니깐. 그래서 난 일도, 집도, 애도. 열심히 돌보는데 서후가 옆에 있어도 정작 같이 감당하는 건 하나도 없어
달 : 어떤 기척도 내기 전에, 숨이 먼저 멈출 수 있어, 눌러두면, 감정이 자기 숨도 잃어버리거든. 블랙페퍼는 그 눌림을 깨우는 향이야.
단비 : 그래서 요즘 내 표정이 점점 딱딱해졌던 거 같아. 웃는 법도 자꾸 까먹고, 그냥 억지로 애쓰는 느낌?
달 : 두 번째는 사이프러스야. 나무처럼 굳어 있는 상태. 변화가 필요하단 건 알지만, 감정이 따라주지 않을 때 고립감은 더 깊어지지.
단비 : 진짜 그랬어. 대화 시도하면 늘 벽이었고, 무시당하는 기분이 더 아프더라. 나 혼자 몸부림친 거야, 이 관계에서.
달 : 사이프러스는 그 외로움이 오래되어 굳어진 향이야. 감정이 막히면 흐름도 끊기거든. 흘러야 이어지고, 이어져야 다시 만날 수 있어.
단비 : 나 이제 무뎌질 줄 알았는데, 아직도 기대하고 있었나 봐. 그래서 더 지친 건지도 몰라.
달 : 마지막 카드는 일랑일랑이야. 부드러운 손길처럼 마음을 감싸주는 향. 상처나 단절 뒤에도, 다시 연결되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숨 쉬고 있거든.
단비 : 아직 끝난 게 아니었으면 좋겠어. 사실 난 우리가 다시 닿을 수 있다고, 그렇게 믿고 있었어.
달 : 일랑일랑은 언어보다 감각이 먼저 움직이는 향이야. 마음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던 거야. 단비가 이걸 고른 건, 여전히 따뜻함을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야.
단비 : 응. 나도 그 따뜻함을 다시 느끼고 싶어. 지금은 좀 아득하지만… 기억이 있다는 건, 다시 닿을 수 있다는 뜻이겠지?
서후 : … 좀 어색하네. 단비 얘기 듣는데, 내 얼굴이 어땠는지도 기억 안 나
지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
달 : 괜찮아. 지금은 감정보다 향이 먼저 기억을 꺼내줄지도 몰라. 서후도, 손이 가는 대로 카드 세 장만 골라볼래?
서후 : 잘 모르겠는데… 손이 가는 게 있긴 했어. 이거, 그냥 집혔어.
달 : 첫 번째는 마조람이야. 겉으론 조용한데, 안에서는 뭔가를 놓지 못하고 계속 붙잡고 있는 긴장된 상태로 보여.
서후 : … 계속 뭘 놓친 기분이야. 말 안 하고 넘긴 게 많아서,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달 : 두 번째는 파출리야. 안에서 감정이 자꾸 어긋나는 상태. 진짜 마음이 뭔지도 헷갈릴 만큼, 스스로를 자꾸 의심하게 돼.
서후 : …그런 거 같아. 내 감정인데, 내가 제일 모르는 느낌. 단비한테도 말 꺼내기 전에 이미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부터 했어.
달 : 파출리는 혼란 속에서 감정을 다시 돌아보게 도와줘. 숨겨진 마음의 결을 차근히 살펴보게 하지. 무너지지 않으려고 버틴 게, 마음을 흐리게 만들기도 하거든.
서후 : 그냥… 아무 일 없는 척하는 게 익숙했어. 근데 그게 편한 것도 아니었는데.
달 : 마지막 카드는 그레이프프룻이야. 무겁게 눌린 기운을 가볍게 덜어주는 향. 숨 막히던 감정들 사이로 바람이 통하게 해.
서후 : 향 맡으니까, 순간 그냥 숨이 트였어. 웃긴데, 잠깐 눈물이 났어. 별일 아닌데도.
달 : 별일 아니게 보여도, 마음에선 큰일이었을 수도 있어. 그레이프프룻은 스스로를 조금 가볍게 해주는 감정의 환기야. 마음이 흘러야 서로 닿을 수 있으니까.
서후 : … 단비 말이 맞았던 것 같아. 난, 그냥 나만 조용히 있으면 되는 줄 알았거든.
달 : 서후는 대화 대신 뭘로 감정을 해소했어?
서후 : 게임. 아무 생각 없이 몰입할 수 있으니까. 그게 편하더라. 지는 것도, 이기는 것도,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있다는 느낌?
단비 : 현실에선 그 어떤 것도 같이 결정하지 않잖아. 애 유치원 문제도, 경조사도, 다 나 혼자 알아서 해야 했고. 근데 게임 아이템엔 200은 쓰더라.
서후 : 그게… 나도 감정 쏟을 데가 없었어. 일 말곤 대화도 없고. 그냥 클릭 몇 번에 반응 오는 세계가, 너무 단순해서 좋았어.
달 : 단순한 세계에 머무르고 싶었던 거구나. 근데 현실은 단순하지 않지. 같이 있는 사람은, 반응해 주길 기다리고 있으니까.
서후 : 난 그걸 너무 늦게 알았던 것 같아.
달 : 서후가 게임 안의 질서에 몰입하듯, 단비도 이 관계에서 뭔가 회복할 수 있는 질서를 원했을 거야. 근데 혼자만 맞춰가면, 그건 질서가 아니라 희생이지.
단비 : 맞아. 난 우리가 같이하는 삶이라고 믿었는데… 점점 나 혼자만 사는 느낌이 됐어.
달 : 지금 이 대화는 시작이야. 단비가 얘기한 그 따뜻함, 서후가 놓치고 살았던 그 표정. 둘 다 기억하고 있잖아.
서후: 이해는 해. 단비 너도 알잖아, 우리 일이라는 게 코드 짜고 로직 돌리고, 머리 복잡해서… 집에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있고 싶었어.
단비 : 그 맘 나도 모르는 거 아니지만, 나도 같은 일 하잖아. 나도 피곤하고 쉬고 싶지. 근데 집도 챙겨야 하고, 애도 챙기고, 서후 너도 챙겨야 해. 거기다 시동생 결혼식, 시어머님 생신, 챙길 거 한두 개 아니야.
근데 넌 늘 그래. 물어보면 ‘알아서 해’ 아니면, ‘잠깐, 한 판만 마저 끝내자’.
…그 한 마디에, 내가 얼마나 투명한 사람처럼 느껴지는지… 넌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
서후 : …그 말 듣고 나니까, 할 말이 없다. 그냥, 내가 너무 피곤한 척하면서 다 넘겼던 거 같아. 미안해.
달: IT개발자라는 일이 창의를 해야 하는 일이라 힘들지. 개발자들이 게임 좋아하는 거 이해해. 근데 혼자 버전 올리면 충돌 나잖아. 같이 테스트하고, 같이 릴리즈하는 게 부부라는 시스템이지
단비 : …그래도 이렇게 얘기하는 서후 보니까, 좀 낯설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
서후 : 나도… 오늘 처음으로, 네 얘기를 제대로 들은 것 같아. 그동안은 그냥, 들리는 척만 했던 거였구나 싶어.
단비 : 우리 둘 다,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론 참 많이 지쳤던 것 같아.
서후 : 응. 이제는 진짜, 같이 말하고 싶어졌어. 어색해도, 천천히 해볼게.
달 : 오늘 이 대화는 저장된 감정의 버전을 다시 불러온 거야. 이제부터는 서로의 마음을 업데이트하면서, 지금보다 더 가볍게 숨 쉴 수 있을 거야.
달 : 단비는 블랙페퍼, 사이프러스, 일랑일랑 에센셜 오일을 함께 블렌딩 해줄게. 따뜻하게 감싸고, 굳은 마음을 천천히 풀어주는 향이야.
단비 : 향만 맡아도 마음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야. 나한텐 이런 따뜻한 숨이 필요했던 것 같아.
달 : 서후는 마조람, 파출리, 그레이프프룻을 섞어보자. 어지럽던 마음결을 정리해 주고, 고요한 환기를 돕는 블렌딩이 될 거야.
서후 : 이 향, 뭔가 낯설지 않게 스며든다. 말보다 먼저 숨이 움직이는 느낌이야. 나도, 지금 이대로 괜찮아지고 싶어.
달 : 다음엔 둘이 같이 업데이트한 이야기를 들려주러 와줄래?
에필로그
한 사람은 조용했고, 다른 한 사람은 숨을 멈췄다.
그 사이에서 아로마 향이 잠들어 있던 감정을 깨운 건, 소리 없는 향의 손짓이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던 두 사람이
조금씩 같은 호흡으로 업데이트되기 시작했다.
속도가 아닌 방향이 중요하다는 걸, 향이 먼저 알려준다.
관계는 코딩보다 복잡하고,
향은 로그보다 솔직하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마음보다 먼저 향을 믿는다.
오늘의 블렌딩이
그들의 다음 연결에 따뜻한 패치가 되길.
언젠가, 같은 숨으로 웃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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