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이 머문 자리에서, 내가 피어난다
달 : 생각이 입가에 닿기도 전에, 향이 먼저 데워줄 거 야진저차 괜찮아?
노을 : 응~ 좋아!
달 : 다행이야. 그 온도, 오늘 너한텐 좀 필요했을지도 몰라.
노을 : 아직 아무 얘기도 안 했는데, 미뤄둔 심장이 먼저 울어버려. 콧끝이 찡긋, 따뜻해진다.
달 : 안에 오래 머문 찬 기운은, 따뜻한 게 닿으면 심장이 먼저 반응해.
노을 : 괜히 눈물 날 뻔했네.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니거든.
달 : 감정을 오래 미루면, 몸이 먼저 응답하지. 특히 생강은 그걸 너무 잘 알아.
노을 : ‘심장이 아프다’는 말, 요즘 나한텐 거의 자동처럼 붙은 말이야. 진짜 아픈 건 아닌데, 그냥… 안 움직여.
달 : 네가 요즘 자주 하는 표현이, 네 마음 어딘가에 오래 머물러 있다는 뜻일지도 몰라.
노을 : 멍하긴 한데, 멍하다는 말로도 설명이 안 되는 그 느낌… 계속 있어.
달 : 그럼, 같이 꺼내보자. 단어 말고, 감정이 먼저 고른 풍경으로.
노을 : 감정이 고른 풍경?
달 : 아로마 카드라고 들어봤어? 향이 담긴 이미지로 마음의 방향을 짚어보는 거야.
노을 : 오~ 신기하다.
달 : 그냥 지금 손이 가는 걸 뽑아봐. 머리 말고, 감정이 먼저 반응하는 걸로.
노을 : 무작정 뽑아도 돼?
달 : 응. 세 장만. 지금의 너를 닮은 향이 손끝에 닿을 거야.
노을 : …그럼 해볼게. 마음보다 손이 먼저 움직일지도 모르니까.
달 : 그게 시작이지. 입술보다 먼저 움직이는 건 언제나 있어. 감정이든, 향이든… 아니면, 네 손끝이든.
노을 : 이 카드 그림이 몽환적이다.
달 : 첫 번째 향이 나왔네. 레몬그라스인데 방향을 잃은 확장이야.
노을 : 그게 뭐야, 방향을 잃은 확장?
달 : 마음은 더 넓어지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를 의미해 , 계속 커지기만 하는 감정은, 결국 무게가 돼.
노을 : 그 말 좀… 뜨끔하다. 나, 그 사람 안에서 커지기만 했던 것 같아. 방향 없이. 그냥 계속 더 주고, 더 기다리고.
달 : 멈추지 못하는 감정은 착한 게 아니야. 애쓴 마음이 길을 잃으면, 결국 자신부터 잃게 되거든.
노을 : 그때는 그게 사랑인 줄 알았어. 지금 와서 보니까… 그냥 무력한 열심이었던 것 같기도 해.
달 : 이번엔 사이프러스네. 변화의 문 앞에서 망설이는 향이야.
노을 : …그 향, 이상하게 좀 서늘해.
달 : 사이프러스는 지나간 계절에 오래 머무는 마음을 알아, 움직이기보다, 익숙한 슬픔을 반복하게 하거든.
노을 : 어쩐지, 그 사람한테서 빠져나온 지 꽤 됐는데도, 계속 어딘가를 빙빙 도는 기분이 들어.
달 : 몸은 나왔지만, 감정은 아직 그때 그 장면 안에 서 있는 거야. 이런 상태에선 어떤 위로도 길을 못 찾지.
노을 : 맞아. 좋은 얘기 다 들었는데도, 마음은 그대로였어, 계속 내가 뭔가 잘못한 사람처럼.
달 : 사이프러스는 그걸 자꾸 붙잡는 대신, ‘이제 충분하다’는 걸 알려줘. 과거에 남긴 감정까지도, 놓아주는 연습이 필요해.
노을 : 근데 그게, 잘 안 돼.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더 쉽겠지 싶었는데, 생각보다 그 장면이 나한테 너무 깊이 박혀 있더라고.
달 : 향은 언어보다 오래 남는 거야, 슬픔도 마찬가지고.
노을 : 그러니까 지금도, 그 계절이 자꾸 다시 오는 것 같아.
달 : 이건 자스민이야. 조용한 밤에 피는, 슬픔을 안고도 살아나는 향이지.
노을 : 이상하게 아픈데 예뻐. 슬픈 장면 속에 갑자기 피어난 꽃 같아.
달 : 억눌렸던 감정도, 어느 순간 다시 피어나. 자스민은 그 조용한 틈을 놓치지 않아.
노을 : 나도 언젠가, 그냥 살아보고 싶어서 웃은 적 있었던 것 같아. 누구한테 사랑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말 그냥.
달 : 그 기억, 네 안에 아직 남아 있어 지금도 잊지 않고 너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몰라.
노을 : 오늘 향들이… 마치 내 안에 멈춰 있던 계절들이, 조용히, 다시 피어나는 것 같아.
달 : 그렇다면 오늘, 넌 아주 조용하게
네 마음을 피워낸 거야.
노을 : 근데 말이야, 아무리 마음을 피워냈다 해도… 금방 꺼질까 봐 좀 겁이 나.
달 : 그럴 땐 향이 오래 머물 수 있게, 공간을 준비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 잠깐만, 향초 하나 켜볼까?
노을 : 향초? 그냥 켜는 게 아니라, 마음을 머물게 하는 거구나.
달 : 맞아. 이건 파출리야. 부서졌던 감정들을 다시 하나로 모아주는 향이지.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 꼭 필요한 향이야.
노을 : 그럼, 나도 조금은… 괜찮은 사람일까?
달 : 그럼. 오늘의 감정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어. 불빛 아래서 이번에도 카드 세 장, 뽑아볼래?
노을 : 응. 손끝이 움직이는 대로 해볼게.
달 : 첫 번째 향은 페티그레인. 무의식이 흐릿할 때, 자꾸 망설이게 되는 향이야.
노을 : … 진짜 이상하네. 나 요즘, 카페 가서도 커피 하나 고르는 데 10분 넘게 걸려. 어떤 기분인지를 모르겠더라
달 : 그게 바로 마음의 방향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신호야. 아까 너, ‘멍하긴 한데 멍하다는 말로도 설명이 안 되는 느낌’이라고 했잖아.
노을 : 맞아. 그 멍한 기운이, 아무 데서나 튀어나와. 사람 많은 곳, 전철 안, 아무것도 아닌 대화에서도 갑자기 숨 막혀.
달 : 그건 정서가 아직 흐르지 못하고 응고되어 있다는 뜻이야. 페티그레인은 네가 지금 그 감정과 마주할 수 있도록 작은 문을 열어주는 거지.
노을 : 근데 그 문 여는 게 너무 무서워.
달 : 무서운 건 당연하지. 그 감정은 계속 미뤄둔 거니까. 근데 오늘은 향이 먼저 그 문 앞에 서 있어. 널 기다리는 마음으로.
노을 : …그다음 카드는 넛맥이야?
달 : 응. 에너지가 바닥났을 때, 무기력과 정체를 알려주는 향. ‘그때는 그게 사랑인 줄 알았다’고 했지?
노을 : 그때 그 사람 만날 땐, 내가 먼저 연락하고 먼저 미안하다고 했어. 늘 ‘이 정도면 되겠지’ 하면서 내 감정은 뒤로 미뤘지.
달 : 근데 결국, ‘나도 잘 모르겠다’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고 했지.
노을 : 그 말, 진짜 잊혀지질 않아. 내가 뭘 잘못했는지조차 모르겠는 감정. 그 후로 모든 관계가 너무 피곤해졌어. 그냥 혼자인 게 더 쉬웠거든.
달 : 넛맥은 그렇게 지친 마음을 직면하게 해. 무기력은 감정이 고장 난 게 아니라, 감정이 너무 오래 일방통행한 결과야. 쉬어야 다시 움직일 수 있어.
노을 : 멈추고 싶은데도, 자꾸 내가 게으른 건 아닐까, 불안했어.
달 : 파출리는 그런 너를 다독여줘. 너는 게으른 게 아니라, 멈출 줄 아는 사람이야. 다시 시작하려면, 먼저 멈춰야 하거든.
노을 : … 마지막 카드는 일랑일랑이야. 예쁘고, 이상하게 마음이 조용해져.
달 : 그건 감정을 하나로 녹여주는 향이야. 너, 아까 말했지? ‘사랑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살아보고 싶어서 웃은 적 있다’고.
노을 : 그때는 진짜 그랬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순간이 가장 나다웠던 것 같아.
달 : 일랑일랑은 그런 감정을 잊지 않게 해 줘. 사랑이란 누군가에게 받는 것만이 아니라, 너 스스로를 껴안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기도 해.
노을 : 나한테 시간을 주는 거… 생각보다 어려웠던 거 같아. 난 사랑하게 되면 내 시간은 없이 그 사람 한데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 생각이 맞던 틀리던 그 사람 한데 맞춘 것 같아 그러다 보니 일하느라 바빠서 전화 안 받음 찾아가고 그러니 첨엔 사랑해서 그런다고 생각해서인지 그 사람도 신경 쓰더라고 되도록 큰일이 아니면 연락 주고 음료를 10분 넘게 골라도 참아주더니 나중에 그 사람도 질렸나 봐 힘겨워하더라고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충분히 힘들어서 나랑 이별을 선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달 : 오늘 이 향초와 카드들이 그 시간을 열 거야. 누구보다 진심이었던 너에게, 네가 직접 건넨 위로.
노을 : 아까보다 마음이 기억을 따라 울컥했는데, 지금은 내 안을 조용히 정리해 주는 기분이야.
달 : 그래. 이게 바로, 감정이 다시 너에게 돌아오는 여정이야.
노을 : 향이 이렇게 오래 머물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어. 근데… 이제 뭘 해야 할까, 다시 살아가려면?
달 : 몸과 마음, 둘 다 다시 움직이게 하려면, 아주 부드러운 자극이 필요해. 오늘은 펜넬차 줄게. 속을 데워주는 따뜻한 차야.
노을 : 향이… 진짜 포근하다. 뭔가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는 느낌이야.
달 : 펜넬은 몸도 마음도 너무 오랫동안 움츠렸을 때, 다시 펴지게 해주는 힘이 있어. 감정도 소화가 필요하거든.
노을 : 나, 그동안 너무 조용했거든. 겉으론 멀쩡했는데, 속은 매일 구겨진 채로 살았어.
달 : 그걸 지금 네가 말하고 있다는 게 중요해. 괜찮다고 넘기지 않고, 인정하고 있다는 거니까.
노을 : … 이번엔 어떤 카드가 나올까?
달 : 첫 번째 향은 블랙페퍼야. 책임감이 과할 때, 몸이 먼저 탈진하는 향이야.
노을 : 그 말, 너무 아프다. 나, 누가 도와달라고 하면 늘 도와줬어. 내가 무너져도 티 안 내고. 근데 그게 자꾸 쌓이다 보니까, 어느 순간 다 숨기게 되더라.
달 : 블랙페퍼는 자기 억압을 많이 겪은 사람에게 자주 찾아와. 누구보다 단단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안에서는 이미 부서지고 있었을 수도 있어.
노을 : 나 그랬던 거 같아.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은데 늘 괜찮다고 얘기했어.
달 : 지금은 알았잖아, 그것이 바로 블랙페퍼가 가진 전환의 시작이야. 무거운 책임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거지.
노을 : 다음은… 타임이네. 향이 조금 쌉싸래해.
달 : 타임은 무기력과 두려움을 꺼내주는 향이야. 속으로는 ‘나 진짜 잘할 수 있을까?’ 하면서,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할 때 자주 나타나.
노을 : 나 지금도 그래. ‘다 괜찮아질 거야’ 하면서도, 사실은 하나도 확신이 없거든. 또 실패할까 봐 겁나.
달 : 그 두려움 자체가 널 나쁘게 만드는 게 아니야. 타임은 그 감정을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돌봄의 신호’로 바꿔주는 향이야. 그렇게 네 안의 작은 용기를 꺼내주지.
노을 : 내가 너무 위축돼 있었던 것 같아. 뭔가 하기도 전에 스스로를 주눅 들게 했던 것 같아.
달 : 오늘 너, 그걸 인정하고 입술로 표현했다는 건 이미 네 안에 용기가 있다는 뜻이야.
노을 : 마지막 카드는… 그레이프프룻이야? 색도 향도 맑아.
달 : 맞아. 그건 감정을 환기시키고, 마음을 다시 가볍게 해주는 향이야. 네가 오늘처럼 깊은 길을 지나왔기에 만날 수 있는 카드지.
노을 : 웃긴 말인데, 방금 진짜 숨이 트였어. 안에서 무거웠던 게 한 번에 터지는 느낌이야.
달 : 그레이프프룻은 낙천성을 회복시키는 향이야. 억지로 긍정적으로 보이려는 게 아니라, 감정을 다 지나고 나서, 자연스럽게 맑아지는 것.
노을 : 그럼… 나 지금, 잘 가고 있는 걸까?
달 : 아주 잘. 무너져도 괜찮다고 표현할 수 있는 네가 되었고, 무서워도 다시 펴질 수 있는 시간을 택했잖아.
노을 : 이상하게… 오늘 하루 안에 계절 하나를 지나온 것 같아.
달 : 그러면, 지금 이 순간. 그 계절 끝에서 너는 어떤 향으로 남고 싶어?
노을 : 음… 나를 꼭 안아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향? 펜넬처럼. 한때는 내 전부, 내 세상이었던 그 사람도… 이젠 보내줘야 나도 해방일 수 있다는 얘기처럼 느껴져.
달 : 맞아. 세상이 무너진 줄 알아도, 다시 살아지고, 피어나는 거지.
오늘 너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한 곡이 떠올랐어.
[볼사-너는 내 세상이었어.]
노을 : 지금 들을 수 있어?
“세상이 무너지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
그 가사… 나도 오늘은 그 노래 속에 잠시 머물고 싶어.
달 : 그럼, 오늘은 그렇게. 이 노래와 함께, 오늘은 그 사람의 계절에 잠시 머물고, 내일은 너의 계절로 걸어 나가는 거야. 펜넬처럼, 조용히 다시 피어나는 향으로.
에필로그
그리고 지금, 노을이는 조용히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한 계절을 보내는 일은, 다시 살아지는 일의 시작일지도 몰라, 무너졌던 마음이 향기로 다시 펴지는 시간.
그 끝에서, 너는 너의 계절로 , 천천히 걸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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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기억은 잊혀도,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늘 누군가를 기다리는 줄 알지만, 어쩌면 감정이 먼저 도착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계절은 과거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나아가야 할 지금일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너의 이름을 부른다.
렌, 루안, 노하.
그들은 마침내, 응답해 주었다.
그 계절로. 그 감정으로.
사라지지 않은 계절에게, 응답한다.
오늘, 여러분도 잠시
잊혔다고 믿었던 그 계절에
살며시 머물러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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