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by 용혀기

요즘은 해가 일찍 지는 관계로 퇴근길에 책을 보지 못한다. 실내등을 켜놓고 볼 수도 있지만 글자를 읽기에는 시력이 에너지를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대신한다. 어느새 아파트 지하주차장은 만석이 되었다. 겨우 한자리를 찾아 주차를 하고 들어가는 길에 아직 라이트가 켜져 있는 주차된 차를 발견하였다. 사람이 아직 내리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으로 집에 들어왔다. 여느 날처럼 나는 헬스장으로 향했다.


헬스장으로 가는 도중에 아까 보았던 차가 보였고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하여 가까이 가서 내부를 보았지만 분명 운전자는 없었다. 부착된 전화번호를 눌렀지만 받지 않아 문자를 남기고 나는 헬스장으로 갔다. 그렇게 한 시간여 동안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주한 그 차는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관리실에 연락을 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하마터면 저 차주인은 내일 아침에 배터리 방전으로 출근에 지장을 받을 뻔했던 것이다.


나는 왜 두번 세 번 전화를 해서 차 주인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려 했을까? 내일도 아니고 모르는 다른 사람 일이다. 내일 아침에 긴급출동을 부르던지 아니면 버스를 타고 가던지 상관할바가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퇴근해서 저녁 먹고 운동 마치는 동안 이차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사이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보았을 텐데 여태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왜일까? 고맙다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저 상태로 두었다가는 다음날 발생할 일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경험들이 있다. 지금이야 자동차 기능들이 좋아져서 컨트롤된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러지 못하는 차들도 있다.


내 일이 아니면 상관하지 않는 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해도 누가 반박할 수는 없다. 앞장서서 도움의 손길을 뻗치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면 최소한 피해는 주지 않는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혼자서도 살아가지 못하는 존재다. 서로 협력의 관계를 통하여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그 안에서 개인의 발전을 이루며 살아간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도움을 받을지는 모른다. 그래서 현재를 빠르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고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은 남 일에 살 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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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영상을 돌아다니다 보면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목격한 영상들이 많이 있다. 거리에 가방이나 지갑이나 카드가 떨어져 있거나 커피숍 테이블에 핸드폰이나 노트북을 그대로 놓고 다녀도 누구하나 훔쳐가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는 영상이다. 새벽시간에도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마음 놓고 돌아다니는 치안이 안전한 나라라는 영상이다. 심지어는 몰카를 실험하는 영상도 있다. 그리고 한국은 안전한 나라면 한국인은 정직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한다. 물론 한국인으로서 감동을 받기도 하고 자부심도 갖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의 방향을 조금만 바꿔보면 한국인은 왜 그럴까?라는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외국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이유를.


전국 곳곳에 설치되어있는 CCTV, 빠른 문자 서비스, 범죄에 대한 강력한 법규, 그리고 서로에 대한 불신의 벽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 들어가지 않기 위할 뿐이다. 행여 다른 사람이라도 도와줄라치면 성추행으로 오해받기도 하고, 가방이나 지갑을 뒤져서 연락처라도 찾을라치면 지갑 속에 현금이 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CCTV를 피해 주차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과속단속 카메라의 위치를 실시간 업로드 하며, 미성년자는 법을 역이용해 범죄를 모의하기도 한다. 가방이나 지갑이 탐나지 않아서가 아니다. 범죄의 대가가 두려운 것이다. 남을 도와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오해받고 싶지 않아서다.


내가 생각을 너무 비약적으로 하고 있지않나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다른 사람의 일에 끼어들지 않으려 하면서도 자신이 당하면은 서운함을 내비치는 모습을 보면서 씁쓸함을 맛본다. 주인을 잃은 가방은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 보지만 기약이 없다. 주인 없이 테이블 위에 남아있는 핸드폰이나 노트북은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그렇게 가게주인만 애가 탄다.


개인주의가 너무 팽창한 사회적 분위기와 제도적인 문제도 없지는 않다. 개인정보에 대한 관리감독이 철저한 사회제도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금물이 되다시피 한다. 인곤지능 AI가 발달하면서 인류의 문화가 바뀌어 가고 세계적 빅테크 기업들의 세계진출이 확대되고 있다. 인공지능의 핵심은 정보의 양에 비례한다. 하지만 한국의 개인정보 보호와 규제는 이를 가로막고 있다. 개인적 성장과 사회적 성장을 기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하고 서로가 감수해야 하는 부분에 대하여 균형적 성찰도 필요하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사고의 깊이를 더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시점에서 나는 철학적 은유를 불러오고 싶다. 우리가 마주한 이 모든 상황은 ‘무관심’과 ‘신중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현대인의 고뇌를 보여준다. 누군가의 일에 개입하는 것이 때로는 오해를 낳고, 불편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조심스러워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작은 불편을 감수하고 손을 내민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직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작은 배려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바꿀 수 있고, 그 하루가 또 다른 선한 영향력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꼭 칭찬받을 일이 아니어도,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나 역시 그런 배려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우리가 서로를 외면하지 않게 만든다. 그래도 아직은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세상이다.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변하고, 사람들은 점점 더 바빠지지만, 그 안에서도 여전히 ‘사람 냄새’ 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 순간들이 모여 우리가 사는 사회를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든다. 그러니 오늘 내가 했던 그 작은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큰 의미가 되었기를 바라며, 나는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간다.


고맙다는 답장문자라도 보나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깨지기는 했지만 그 차주인은 여느날과 같은 모습으로 오늘 하루를 시작했을것이란 생각에 내 스스로에게 칭찬을 보내본다.




이글은 티스토리 you1519@tistory.comdp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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