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묵

정성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있으랴.

by 정미선

저녁 반찬거리가 마땅하지 않습니다. 이런 날이 어찌 오늘뿐이겠습니까마는 유난히 메뉴가 떠오르지 않아 고심이 됩니다. 그렇다고 식재료를 사러 밖을 나가기도 싫고 마침 냉동고를 털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냉동실을 뒤져보니 엄청난 식재료가 숨어있습니다. 지난 가을 주워온 도토리로 만들어 놓은 도토리묵 재료입니다.


남편이 관리하는 산에 떡갈나무가 많아 가을이면 도토리와 상수리가 수북히 쌓입니다. 줍지 않으면 땅에 떨어져 거름이 되겠지만 내가 주워와도 동물들의 먹이로도 충분하고 땅의 거름으로도 충분하기에 지난 가을 열심히 주워왔습니다. 도토리묵을 집에서 만든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는 것을 만들어 보면 압니다.


주운 도토리를 쪼개 두어야합니다. 쪼개두지 않으면 며칠 후 흰벌레가 도토리를 모두 갉아 먹어버립니다. 쪼개지 않고 말린다고 두었다가 도토리를 뚫고 나오는 흰벌레에 기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두꺼운 껍질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두꺼운 껍질을 어떻게 뚫고 나오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쪼개둔 도토리를 잘 말려줍니다. 말린 도토리를 물에 담궈 떫은 맛을 빼 주어야 합니다. 이틀정도 물에 담궈두면서 하루에 한 번 정도 물을 갈아주어야 떫은 맛이 빠집니다. 너무 오래 담궈두면 떫은 맛이 모두 빠져서 도토리묵의 쌉싸름한 맛이 없어집니다. 어느 정도 떫은 맛이 빠지면 믹서에 갈아서 녹말을 추출합니다. 믹서에 간 도토리를 면주머니에 넣어 주물주물 해 주면 녹말이 추출됩니다. 추출된 녹말물을 하루정도 가라앉힌 후 윗물은 버리고 녹말만 말리면 도토리묵가루가 됩니다. 옛날에는 보관 시설이 없어서 말려서 보관했겠지만 냉동실에 1회분씩 소분하여 냉동시키면 굳이 말리지 않아도 됩니다. 이렇게 지난해 준비해 둔 도토리 녹말 덩어리를 냉동고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심봤다"를 외치며 얼린 녹말물을 녹을 수 있도록 상온에 둡니다. 완전히 녹으면 물을 넣어 끓이는데 잘 저어주어야 합니다. 저어주지 않으면 냄비의 밑바닥이 눌러붙어 탄냄새가 납니다. 물이 끓으면서 풀처럼 변하는데 들기름 한 숟가락, 소금 약간을 넣어 5분 정도 더 끓여준 후 유리그릇이나 스텐 그릇에 끓은 도토리풀죽을 부어서 식을 수 있게 시원한 곳에 둡니다. 식으면 묵이 드디어 완성입니다. 묵을 한입 베어 목에 넘기는 순간 이 지난한 과정은 바로 용서됩니다. "바로 이맛이야! 보드라운 식감, 약간 쌉싸름한 이맛"


장하준 교수의 경제학 레시피 책에는 도토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토리묵을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이 음식을 최고급 요리라고 우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도토리를 이베리코 돼지가 먹으면 바로 무엇과도 견줄 수없는 고소하고 깊은 맛이 나는 햄이 탄생한다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햄은 하몬 이베리코인 것 같다고도 합니다. 무지 때문에 그리고 어떨 때는 악의적 의도를 가지고 '낯선' 문화에 부정적인 고정 관념을 적용할 때가 있다고 말하며 그런 태도가 문제의 진정한 원인을 놓치는 오류로 이어진다고 지적합니다. 도토리 하나에도 이렇듯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니. 이베리코 돼지고기를 파는 가게가 제가 사는 광주에도 여러 곳이 생겼습니다. 낯선 단어들로 구성되어 메뉴판에 있는 베요타가 스페인어로 도토리라고 하며 베요타는 소고기 못지 않은 맛이 납니다. 결코 돼지고기라 믿기지 않은 이맛이 도토리를 먹은 탓이라니 도토리의 어떤 성분이 이렇게 부드럽고 깊은 맛을 내게 하는지 궁금합니다.


도토리의 효능을 찾아보니 가장 두드러진 효능이 중금속, 미세먼지를 배출하는 아콘산 성분이 많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또 칼로리가 낮아 포만감을 주어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되고 섬유질 함량이 높아 배변을 부드럽게 하고 체내 체지방의 분해와 체지방 생성을 억제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콜레스테롤 관리, 산화방지, 간의 건강, 부종 개선에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도토리묵을 간장 양념에 야채와 함께 곁들여 먹어도 맛이 그만이지만, 도토리묵밥은 상큼하게 입맛을 돋우어 줍니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냉면 육수에 도토리묵, 송송 썬 묵은김치를 넣고 쪽파와 김가루를 넣기만 하면 됩니다.


봄기운을 넘어 약간은 날씨가 더워지고 있습니다. 시원한 묵밥을 먹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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