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란 가면을 쓴 사랑

by 고지윤

운명론자이던 제가 어떻게 세상엔 운명 따윈 없다고, 우리가 운명이라 부르던 사랑은 그저 우연이란 얼굴에 덧씌워진 가면일 뿐이라고 여기게 되었을까요.


그때쯤이었던 것 같네요. 서로에게 사랑과 고마움 같은 따사로운 감정의 낱말들 대신 미안함, 서운함 그리고 괴로운 글들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던 그 시기였죠. 그 후부터 저는 글을 써 내려가는 게 조금 두려워졌습니다. 아무리 명랑하고 밝은 글을 쓰려고 해도 금세 어둡고 불쾌한 글들만 풀려나왔거든요. 그 덕에 전 저의 무수한 감정들을 밖으로 뱉어내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어떻게 보면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참 신기합니다. 우리가 떨어져 있을 땐 우연의 연속으로 우린 하나가 되었고 하나가 된 후엔 필연적으로 서로를 밀어내게 된 것처럼 저는 감정표현이 서툴러 글을 쓰기 시작했었는데, 글을 쓰다 보니 글 쓰는 게 두려워져 글을 못 쓰게 되었고 되려 감정을 표현하는 게 익숙해졌어요.


그렇게 저는 더 이상 형태로서의 사랑을 당신에게 갈구하지 않게 되었고 행위로써의 사랑을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노력을 통해 행위로써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된 것이고 우리가 운명이라 믿었던 사랑의 가짜 모습은 점점 잊히게 되었죠. 동시에 제 삶에서 당신이란 존재도 점점 희미해져 갔고 그 희미해져 가는 기억마저 작은 사랑이 되어 제 마음에 옅게 새겨졌어요.


또 당신을 통해서 저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답니다. 지금에 와서는 제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 하는 형태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다 “라는 고된 행위를 통해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그로 인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나 자신까지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제야 감히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본질적인 사랑을 생각하다 보면 “과연 사랑은 영원한 것일까”라는 의문까지 갖게 되는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원한 사랑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제가 생각하는 영원한 사랑은 영원, 불멸, 불변과 같은 단어들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요. 왜냐하면 인생이란 아무런 예고 없이 쉽게 변하기 마련이며, 사랑을 한다고 해서 우리 인생에서 이 원칙이 바뀌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지켜본 수많은 생명들이 행하던 사랑은 상황에 따라 흩어지고 가변적이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사랑이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것은 흩어지고 변하고 사라지면서도 사랑은 순환하거든요. 다양한 마음으로, 다양한 생각으로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자연에서 사람에게 그리고 또다시 사람으로부터 자연에게 이런 식으로 사랑은 변화하기도 사라지기도 하며 영원히 순환할 거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