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주인의 무게

by 고지윤


펜트하우스의 소음과 화약 냄새가 일순간에 지워졌다. 지윤이 공간을 찢어 발을 내디딘 곳은 서늘한 새벽 공기가 감도는 낡은 옥상이었다. 지윤의 자취방, 하진과 함께 밤하늘을 보며 투박한 위로를 주고받았던 그 작은 옥탑방 앞이었다.


“...지윤아.”


하진이 지윤의 품 안에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안색은 창백했고, 무효화 영역을 무리하게 확장한 반동으로 전신이 떨리고 있었다. 지윤은 대답 대신 그녀를 조심스럽게 평상 위에 앉혔다.


“팀장님, 이제 괜찮아요. 아무도 못 와요.”


지윤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낮고 단단해져 있었다. 하진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지윤의 눈을 보았다.

예전의 겁에 질린 사슴 같던 눈동자가 아니었다.

하진의 무효화 장벽조차 뚫고 나온 그의 공간 왜곡

파동은 이제 지윤의 통제 하에 고요하게 갈무리되어 있었다.


하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지켜야 할 '대상'이었던 청년이, 이제는 자신을 안고 공간을 넘어올 만큼 거대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지윤은 하진의 뺨에 묻은 먼지를 투박한 손길로 닦아내며 먼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제 안의 뭔가는 완전히 부서진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제가 누굴 지켜야 하는지.”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은 짧았지만 깊었다. 그것은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가 무너지고, 대등한 ‘동료’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로 재정립되는 엄숙한 의식과도 같았다.


사흘 뒤, 관리국 본부 특수 전략 상황실.


임시 조치를 마친 지윤은 더 이상 환자복이나 수형자 복장이 아닌, 관리국 최정예 요원들만이 입는 검은색 전술 슈트를 입고 있었다. 상황실 중앙 홀에는 국장을 포함한 고위 간부들이 집결해 있었고, 그들 앞에는 지윤의 새로운 신분 정보가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Status: 특수 전략 요원(Special Strategic Agent)]

[Authority: S급 독자 작전권 부여]


“...이례적인 일입니다. 각성한 지 채 한 달도 안 된 능력자를 전략 자산으로 공표하다니요.”


한 간부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 하진이 차갑게 대답했다. 그녀의 팔에는 여전히 깁스가 감겨있었지만, 눈빛만은 서슬 퍼렜다.


“강지윤 요원은 이미 기존의 구속 장치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그를 억압하려 드는 순간,

관리국은 가장 강력한 적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날개를 달아주고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현재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입니다.”


지윤은 수트의 장갑을 조이며 묵묵히 서 있었다.

이제 그는 ‘특별 관리 대상’이라는 낙인을 벗어던졌다. 하지만 그 대가로 짊어진 ‘전략 요원’이라는 이름에는 훨씬 무겁고 막중한 책임이 뒤따를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같은 시각,


세린의 펜트하우스는 폐허가 된 채 버려져 있었다.

유리 조각이 흩어진 거실 한복판에 세린이 홀로 앉아 있었다. 지윤에게 거부당하고, 자신의 암시마저 깨진 충격은 그녀의 영혼을 조각냈다.


“추악한 소음... 내가?”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리던 세린의 뒤로, 공기가 진공처럼 어두운 그림자에 잡아먹히기 시작했다. 그림자 속에서 서늘한 기운이 밀려오며 한 남자가 나타났다. 바르가스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거대한 기운을 가진 이클립스의 상위 간부, **‘데미안’**이었다.


“실망스럽군, 세이렌. 관리국 요원들까지 주무르던 네가 고작 그 애송이 하나에게 버림받고

이 꼴이라니.”


“가버려. 지금은 노래할 기분이 아니니까.”


세린이 눈동자를 보랏빛으로 빛내며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데미안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그녀의 주변 공간이 순식간에 어두운 그림자 상태로 변했다. 목소리가 매질을 잃고 허무하게 소멸했다.


“네 능력은 이미 분석이 끝났다. 우린 바르가스의 복수가 필요한 게 아니야. 강지윤, 그 괴물을 폭주시키기만 하면 돼. 녀석을 다시 끌어내기 위해선 너만큼 좋은 미끼가 없지.”


데미안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그림자가 세린의 사지를 결박하고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세린은 고통 속에서 신음했지만, 데미안의 무력은 압도적이었다. 이클립스는 지윤을 손에 넣기 위해, 그의 약점이 된

세린을 잔혹하게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관리국 전략실 모니터에 적색경보가 울려 퍼졌다.

“한남동 일대, 강력한 이능력 파동 및 이클립스 간부급 신호 감지!” 전략실 요원이 소리쳤다.

하진이 무기를 챙기며 지윤을 만류했다.


“지윤아, 함정이야. 이건 너를 노골적으로 유인하려는 수법이야. 지금 가면 위험해.”


하지만 지윤은 이미 허공에 손을 뻗고 있었다.

“함정인 거 알아요. 하지만 저 때문에 말려든 사람이에요. 제가 구해야 합니다.”


치익—!

공간이 종이에 베인 것처럼 갈라지며 지윤의 모습이 그 속으로 사라졌다. 0.1초 뒤, 지윤은 펜트하우스 옥상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거꾸로 매달려 그림자에 잠식당해 가는 세린과, 그를 비웃으며 기다리는 데미안이 있었다.


“어서 와라, 관리국의 개가 된 기분은 어떠냐?”


데미안이 세린의 목을 그림자로 압박하며 조롱했다. 세린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지윤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오지 말라고, 도망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림자의 압박 속에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지윤은 말없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주변의 이클립스 요원들이 일제히 고화력 화기를 발사했다. 하지만 지윤이 손을 가볍게 휘젓자, 날아오던 탄환들의 ‘공간’이 뒤바뀌었다.

콰아아앙—!

탄환들은 오히려 발사한 요원들의 발밑에서 폭발했다. 비명 소리가 채 퍼지기도 전에 지윤은 데미안의 코앞까지 나타났다.


“내 사람에게 손대지 마.”


지윤의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데미안의 팔이 기괴한 각도로 뒤틀렸다. 지윤은 데미안의 그림자 구속을 맨손으로 찢어버리고, 추락하는 세린을 허공에서 받아내었다. 지윤은 세린을 품에 안은 채, 그녀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더 이상 노래하지 마요. 이제 내 목소리만 들으면 되니까.”


그 순간, 세린의 세계가 뒤집혔다. 자신을 버린 남자에 대한 원망도, 그를 소유하려 했던 오만함도 모두 사라졌다. 자신을 구원한 이 압도적인 힘, 그리고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자신을 안아준 이 남자의 품 안에서 세린은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에 휩싸였다.

그것은 사랑도, 소유욕도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신 앞에 선 신도가 느끼는 **‘숭배’**였다.


“...지윤 님.”


세린의 입술에서 가녀린 호칭이 새어 나왔다. 지윤은 데미안을 향해 손을 뻗어 공간을 압착시키며 차갑게 선언했다.


“가서 이클립스에 전해. 다음에 또 이런 짓을 하면, 너희 본거지를 세상에서

지워버리겠다고.”


지윤이 세린을 안고 공간 속으로 사라지자, 폐허가 된 현장에는 데미안의 처참한 비명만이 남았다. 관리국으로 돌아가는 찰나의 순간동안 세린은 지윤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그녀에게 지윤은 가지고 싶은 보석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과 영혼을 바쳐야 할 유일한 주인이 되어있었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