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잠식하는 선율과 붉은 달의 침입

by 고지윤


공간이 비명을 지르듯 찢어지며 나타난 지윤은 한남동 펜트하우스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 사이로 하진의 무효화 능력과 지윤의 절대적 공간왜곡의 충돌로 인해 과부하가 걸려 타버린 초커의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다. 지윤은

전신의 신경이 타는 듯한 고통에 몸을 떨면서도, 자신을 감싸 안는 익숙한 장미 향에 간신히 눈을 떴다.

“정말 와줬네요, 지윤 씨. 그 차가운 곳에서 탈출한 걸 축하해요.”

세린은 기다렸다는 듯 부드러운 실크 가운을 휘날리며 지윤의 곁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녀는 겁에 질린 지윤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지윤은 자신을 억누르던 하진의 무거운 영역에서 벗어나, 세린이 제공하는 무조건적인 ‘안식’에 정신없이 매료되었다. 그의

A.V.M 기질은 지금 이 순간, 생존을 위해 세린의 따뜻함에 적응하고 있었다.

“팀장님이... 팀장님이 틀렸어요. 세린 씨는 이렇게... 저를 걱정해 주는데...”

“쉿, 이제 그 차가운 목소리는 잊어요. 여기서는 오직 내 노래만 들으면 돼.”

세린은 지윤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낮게 흥얼거렸다. 인간의 언어라기보다는 미세한 진동에 가까운 선율이 지윤의 뇌신경을 타고 흘러들었다. 지윤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흐릿하게 풀려갔다. 세린의 묘한 음성이 지윤의 의지 깊숙한 곳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시각, 관리국 본부 상황실.

“강지윤의 GPS 신호가 끊겼습니다! 마지막 위치는 한남동 일대입니다!”

상황실 요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고함을 지르듯 보고했다. 하진은 훈련실 현장에서 수거한 초커 파편을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쥔 채 통제실로 들어왔다. 그녀의 눈은 평소보다 더 서늘한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추적 시스템 가동해! 한남동 인근의 모든 주파수 대역 검사하고, 공간 왜곡 잔류 파동 추적해!”

“팀장님, 그게... 이상합니다. 해당 구역의 파동 감지기가 전부 먹통입니다.”

중앙 모니터를 관리하던 최정우 과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하진을 돌아보았다. 그는 하진이 가장 신뢰하는 정보 분석 전문가이자 오랜 동료였다.

“원거리에서 고주파 간섭이 들어온 것 같은데, 데이터가 아예 실시간으로 삭제되고 있습니다. 복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팀장님은 일단 진정하시고 대기하시죠.”

하진은 멈춰 섰다. 최 과장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의 태도가 평소와 달랐다.

원칙주의자인 최 과장이라면 서버 오류를 보고하는 즉시 복구 매뉴얼을 실행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멍한 눈으로 하진을 바라보며 ‘대기’만을 종용하고 있었다.

하진은 그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최 과장의 눈동자는 초점이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고,

마치 누군가의 명령을 억지로 되새기는 듯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거리고 있었다.

‘암시인가? 아니면 세린 주변에서 느꼈던 그 이질적인 파동 때문인가?’

하진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세린이 관리국에 왔을 때, 이미 최 과장의 정신에

어떤 식으로든 손을 써둔 것이 분명했다. 하진은 망설임 없이 최 과장의 뒷덜미를 정확히 가격해 기절시켰다. 상황실 요원들이 경악하는 사이, 하진은 최 과장의 태블릿을 낚아채 직접 데이터를 훑었다. 삭제되기 직전의 마지막 로그에는 한남동 펜트하우스의 좌표와 함께, 이클립스 소유의 비공식 항공기가 해당 구역을 향해 급속도로 이동 중이라는 경고가 떠 있었다. 그들의 타깃 정보란에는 강지윤의 사진과 함께 짧은 명령이 적혀 있었다.[Target: 공간 전이 능력자 확보. 저항 시 무력 사용 허가.]“단순한 이탈이 아니었어. 강지윤, 네가 위험해.” 하진은 홀스터에서 총을 꺼내 들고 본부 주차장으로 달려 나갔다.

다시 세린의 펜트하우스.

세린이 지윤을 침대에 눕히고 그에게 더 깊은 최면을 걸려던 순간, 평온하던 거실의 공기가

거대한 진동에 흔들렸다.

쿠우웅—!

천장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통유리가 와장창 깨지며 흩어졌다.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을

뿜는 여러 명의 그림자가 거실로 내려앉았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일그러진 붉은 달, 반정부

조직 **‘이클립스’**의 표식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목표 확인. 공간 전이 능력이다. 목표물을 확보해.”

“무례하네. 남의 집에 들어올 땐 노크 정도는 하라고 배웠을 텐데.”

세린은 당황하기는커녕 불쾌하다는 듯 차갑게 읊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소리를 끌어올렸다.

“멈춰.”

그녀의 입술에서 터져 나온 비가시적인 음파가 거실 전체를 강타했다. 돌진하던 이클립스 하급 요원 6명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듯 제자리에 멈춰 서서 괴로워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몇몇은 고막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괴한들 중 가장 체구가 큰 사내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클립스의 고위간부인 **‘바르가스’**였다.

바르가스가 육중한 손을 들어 올리자, 세린의 음파가 그의 몸 주변에서 둔탁하게 굴절되며

소멸했다.

... 능력을 무마시켰어?”

세린의 미간이 좁아졌다. 바르가스의 능력은 ‘압력 왜곡’

. 그는 자신 주변의 공기 밀도를

극도로 높여 음파가 전달되는 매질 자체를 짓눌러버리고 있었다. 세린의 치명적인 선율이 그의 영역 안에서는 그저 먹먹한 소음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과연 관리국 요원들까지 홀린 재주답군. 하지만 공기가 떨리지 않으면 네 노래도 그저 붕어의 뻐끔거림일 뿐이지. 그 애송이는 우리가 데려간다.”

바르가스가 육중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리석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세린의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짙게 타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의지’를 목소리에 실어

바르가스의 압력 장벽을 뚫으려 했다.

“멈추라고!”

세린의 고함과 함께 주변의 가구들이 산산조각 났지만, 바르가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주먹 주변 압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세린의 코앞에서 거대한

주먹을 치켜들었다.

바르가스의 주먹이 세린의 안면을 강타하기 직전, 펜트하우스의 현관문이 굉음과 함께날아갔다.

콰아앙—!

순식간에 푸른색 파동이 거실 전체를 휩쓸었다. 하진의 **‘광역 무효화’**였다.

바르가스의 압력 왜곡도, 세린의 음파 진동도 푸른 파동에 닿는 순간 신기루처럼 증발했다.

허공에서 멈춘 바르가스의 주먹이 맥없이 떨어졌고, 세린 역시 갑작스러운 능력 소실에

현기증을 느끼며 휘청였다.

“전부 엎드려! 관리국이다!”

연기 사이로 하진이 총을 겨누며 난입했다. 그녀의 눈은 분노와 지윤을 향한 걱정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하진은 바닥에 쓰러진 지윤의 상태를 훑은 뒤, 세린과 바르가스를 차례로

노려보았다.

“세린, 네가 관리국 요원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나중에 따지지. 그리고 이클립스...

내 구역에서 강지윤은 한 발짝도 못 나간다.”

지윤을 소유하려는 세린, 그를 탈취하려는 이클립스, 그리고 그를 지키려는 하진. 세 명의 의지가 무효화 파동 안에서 날카롭게 부딪히기 시작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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