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무채색의 전장

by 고지윤




하진의 푸른색 무효화 파동이 거실을 쓸고 지나간 순간, 펜트하우스는 기괴한 정적에 잠겼다. 화려한 이능력의 파티클이 사라진 자리는 무채색의 차가운 현실만이 남았다. 바르가스의 압력 장벽도, 세린의 매혹적인 선율도, 그리고 지윤을 혼란스럽게 하던 암시의 파동도 일순간에 증발했다.

“이게... ‘무효화’의 영역인가.”

바르가스가 자신의 손을 쥐었다 펴며 낮게 읊조렸다. 초인적인 힘이 빠져나간 자리에 평범한 인간의 근육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클립스의 간부답게 그는 능력이 거두어진 순간에도 살인 병기였다.

“전원, 근접전으로 전환해. 목표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확보한다!”

바르가스의 명령에 부하들이 전술 단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하진은 총구를 고쳐 쥐며 지윤의 앞을 막아섰다. “내 영역 안에서 까불지 마.”

탕! 탕!

하진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녀의 사격술은 정교했다. 달려들던 요원들의 어깨와 다리에 정확히 구멍이 뚫렸다. 하진은 탄창이 비자마자 총을 던져버리고 요원의 턱을 돌려차기로 걷어찼다. 그녀의 격투술은 수천 번의 실전으로 다져진 생존수단 그 자체였다.

그러나 문제는 바르가스였다. 그는 이능력이 없어도 타고난 신체 스펙 자체가 괴물이었다. 하진의 주먹이 그의 명치를 타격했지만, 바르가스는 미동도 없이 하진의 목을 움켜쥐고 벽으로 밀쳐버렸다.

“꺽...!”

“기술은 좋군, 팀장. 하지만 체급의 차이는 무효화할 수 없지.”

바르가스가 하진을 벽에 처박고 주먹을 휘둘렀다. 하진은 간신히 고개를 돌려 피했지만, 대리석 벽면이 박살 나며 파편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세린 역시 바닥에 떨어진 화분 조각을 집어 들며 바르가스에게 달려들었으나, 바르가스의 거친 손짓 한 번에 종이 인형처럼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 아수라장의 한복판에서, 지윤이 눈을 떴다.

귀를 멍하게 만들던 세린의 선율이 사라진 자리, 지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처참한 광경이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온몸에 피멍이 든 채 바르가스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는 하진, 그리고 입가에 피를 흘리며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세린.

“지윤 씨... 도망쳐요... 저 여자는 당신을 다시 어두운 방에 가둘 거야...”

세린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엔 더 이상 이능력이 실려 있지 않았지만, 지윤의 마음을 흔드는 교묘한 독기는 여전했다.

“아니야, 강지윤! 내 손 잡아! 널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야 해!”

하진이 바르가스의 팔에 매달린 채 비명을 질렀다. 두 여자의 목소리가 지윤의 머릿속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안전’이라는 이름의 구속인가, ‘자유’라는 이름의 기만인가.

그 순간, 지윤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겠다는 강렬한 **‘거부의 의지’**였다. 그 의지가 지윤의 몸 속에 잠들어 있던 A.V.M 기질을 다시 한번 뒤흔들었다.

두근—!

심장 박동 소리가 고요한 전장에 울려 퍼졌다.

하진의 무효화 파동은 영역 내의 모든 '이능'을 지워버리는 법칙이다. 하지만 지윤의 A.V.M은 그 법칙 자체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무효화라는 법칙 속에서도 자신의 공간 전이 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세포 하나하나가 물리 법칙을 새롭게 재정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말도 안 돼.”

바르가스의 손아귀에 눌려 있던 하진이 경악 어린 눈으로 지윤을 보았다.

지윤의 몸 주변으로 푸른색(하진의 파동)과 보라색(지윤의 파동)이 뒤섞인 기묘한 오로라가 일렁였다. 지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진의 영역 안이었지만, 지윤의 발 밑에서는 이미 공간이 물결치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만해... 이제 그만하라고!”

지윤이 바닥을 강하게 내디뎠다. 순간, 지윤의 뒤에 있던 공간이 거대한 입을 벌리듯 찢어졌다. 이전의 불안정했던 전이와는 차원이 다른, 정교하고 날카로운 **‘공간 절단’**이었다.

지윤은 바르가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이동이 아니었다. 지윤과 바르가스 사이의 거리를 상징하는 ‘공간’ 자체가 접혀버렸다.

슈우욱—!

찰나의 순간, 지윤의 주먹이 바르가스의 가슴에 박혔다. 단순한 외부의 타격이 아니었다. 주먹이 박힌 지점의 공간이 뒤틀리며 바르가스의 거구는 펜트하우스 밖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끄아아악!”

이클립스의 간부 바르가스가 추풍낙엽처럼 빌딩 아래로 추락했다. 지윤은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제 더 이상 겁에 질린 청년의 것이 아니었다.

지윤은 고개를 돌려 세린을 보았다. 세린은 지윤의 각성을 보며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역시... 내 보석다워요. 지윤 씨, 이리 와요.”

하지만 지윤은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세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순간, 세린이 지윤의 뇌 깊숙이 심어두었던 ‘장미 향기’와 ‘달콤한 선율’의 조각들이 지윤의 강력해진 공간 왜곡 파동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들려요, 세린 씨. 당신의 감미로운 목소리 뒤에 숨겨진 그 추악한 소음이.”

세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지윤은 그녀가 걸어둔 정신적 암시를 스스로 깨버린 것이다. 지윤은 비틀거리는 하진을 부축해 세워주었다. 하진은 멍하니 지윤을 바라보았다.

“강지윤... 너...”

“팀장님 말대로 돌아갈게요. 하지만 예전처럼 갇혀 있지는 않을 겁니다.”

지윤의 주변 공간이 다시 한번 절단됐다. 그는 하진을 데리고 스스로 공간을 찢어 이동하려 했다. 하진의 무효화 영역조차 지윤의 진화한 의지를 막지 못했다.

펜트하우스에는 자신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진 것을 직감한 세린의 서늘한 웃음소리만이 남겨졌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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