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뒤섞인 좌표

by 고지윤



자취방의 낡은 천장 대신, 지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쏟아질 듯한 밤하늘의 별들이었다.

“헉!”

지윤은 급하게 숨을 들이키며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의 딱딱한 매트리스 대신 몸을 감싸는 것은 서늘한 밤공기와 부드러운 야외용 선베드의 촉감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아찔한 높이의 루프탑 수영장이 펼쳐져 있었다. 서울의 야경이 발밑으로 흐르는 이곳은 세린이 거주하는 한남동 펜트하우스의 옥상 정원이었다.

“성공했네? 정말로 와줄 줄이야.”

익숙하고 달콤한 목소리에 지윤이 고개를 돌렸다. 수영장 난간에 기대어 와인 잔을 들고 있는 세린이 있었다. 그녀는 무대 위 화려한 드레스가 아닌, 얇은 실크 가운 차림이었다. 달빛을 받은 그녀의 피부가 비현실적으로 하얗게 빛났다.

“세린 씨… 여기는… 내가 왜 여기에….”

지윤은 혼란스러웠다. 분명 하진이 가르쳐준 대로 '닻'을 내리려 애썼다. 하지만 잠결에 맡았던 그 향초의 향기, 그리고 귓가를 맴돌던 그녀의 속삭임이 나침반이 되어 공간의 좌표를 비틀어버린 것이다.

“내가 불렀으니까.”

세린이 천천히 다가와 지윤의 앞에 멈춰 섰다. 그녀에게서 낮에 선물 받았던 그 향초와 똑같은 냄새가 났다. 세린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지윤의 목에 채워진 차가운 초커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이런 무식한 물건에 묶여서 고생하는 게 안타까워. 지윤 씨처럼 특별한 사람이 왜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해?”

세린의 목소리는 낮고 은밀했다. 지윤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톱스타인 그녀가 자신을 이토록 가깝게, 그리고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지윤 씨의 그 능력, 나한테는 축복처럼 보여. 나랑 같이 있으면 이 초커 따위 잊게 해 줄 수 있는데. 아니, 오히려 이 능력을 즐기게 해 줄 수도 있어.”

세린은 지윤의 가슴팍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일렁였다. 세이렌의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이 남자의 공간을 찢는 능력은, 평생 정체를 숨기며 고독하게 살아온 그녀를 유일하게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탈출구라고.

같은 시각, 지윤의 옆방.

“삐— 삐— 삐—”

날카로운 경보음이 하진의 잠을 깨웠다. 하진은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 모니터를 확인했다. 지윤의 바이탈 신호가 사라졌다. 초커의 GPS 좌표가 옥탑방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한남동으로 찍혀 있었다.

“빌어먹을!”

하진은 겉옷을 챙길 새도 없이 권총을 집어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분명 지윤의 뇌파는 안정적이었다. 강제로 잠을 깨우는 전기 자극도 발동하지 않았다. 이건 지윤이 의도적으로 시스템의 허점을 찔렀거나, 혹은 외부의 강력한 개입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하진은 관리국 전용 차량의 액셀을 밟으며 무전기를 켰다.

“특별관리팀 서하진이다. 관리 대상 강지윤 탈주. 좌표 한남동 펜트하우스 옥상. 해당 구역의 통신 및 CCTV 기록 즉시 확보해!”

차를 몰며 하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한남동 펜트하우스? 그곳은 낮에 다녀온 세린의 집이었다. 단순한 우연일 리 없었다. 하진은 낮에 세린이 지윤에게 건넸던 향초, 그리고 작별 인사를 하던 그 묘하게 가까웠던 거리를 떠올렸다.

‘그 여자… 뭔가 있어.’

하진은 요원 시절 익힌 직감을 떠올렸다. 세린은 피해자로서 너무나 침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윤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피해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과 똑같은 보석을 발견한 수집가의 광기와 닮아 있었다.

다시 펜트하우스 옥상.

세린은 지윤의 목덜미를 감싸 안으며 얼굴을 가까이 밀착했다. 지윤은 그녀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머릿속이 몽롱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진이 가르쳐준 ‘이성이 통제하는 세계’가 무너지고, 세린이 제안하는 ‘감각이 지배하는 세계’가 그를 잠식해 왔다.

“지윤 씨, 나랑 약속 하나만 해. 관리국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하고, 가끔 이렇게 나를 찾아와 줘. 그럼 내가 당신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게.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잠을 잘 수 있게.”

세린의 입술이 지윤의 귓가에 닿으려던 찰나, 옥상 출입문이 거칠게 열렸다.

“거기까지!”

하진이었다.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권총을 세린과 지윤을 향해 겨누었다. 하진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강지윤, 당장 그 여자한테서 떨어져!”

지윤은 깜짝 놀라 세린을 밀쳐내듯 일어섰다. 세린은 흐트러진 가운을 매만지며 여유롭게 하진을 바라보았다.

“어머, 팀장님. 여기까지 웬일이세요? 지윤 씨가 갑자기 저희 집 옥상에 나타나서 저도 너무 놀라 달래주던 참이었는데.”

“연기는 그만두지. 일반인이 공간 이동 능력자의 좌표를 고정해 주는 ‘앵커’ 역할을 하는 건 불가능해.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하진이 세린에게 다가갔다. 하진의 무효화 영역이 세린의 주변을 감싸자, 세린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하진은 놓치지 않았다. 세린의 주변에서 미세하게 감지되는 비정상적인 주파수. 그것은 장비 없이는 잡히지 않을 만큼 미약했지만, 하진의 본능은 소리치고 있었다. 이 여자는 일반인이 아니다.

“강지윤, 이쪽으로 와.”

하진이 지윤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지윤은 세린과 하진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세린은 멀어지는 지윤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지윤 씨, 향초… 꼭 켜고 자요. 알았죠?”

그날 밤, 지윤은 하진에게 끌려가다시피 돌아오며 자신의 목에 걸린 초커보다 더 무거운 무언가가 가슴속에 자리 잡았음을 느꼈다. 자신을 지키려는 하진의 차가운 손과, 자신을 유혹하는 세린의 뜨거운 목소리.

지윤의 세계는 이제 두 여자가 긋는 경계선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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