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시에서 돌아와 나의 WHY를 다시 묻다
나는 브런치에 글을 쓴다.
꼭 작가가 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생각이 흩어지지 않게 붙잡기 위해서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작은
내게 아직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강연을 듣고,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며
그들의 질문을 잠시 빌린다.
그리고 돌아와
그 질문을 나의 언어로 다시 쓴다.
2026년 2월 11일,
세바시 첫 강연회는 그 통과의 순간이었다.
주제는 “당신의 WHY가 내일의 WAY”
말은 익숙했다.
그러나 무대 위의 감정은 낯설 만큼 뜨거웠다.
박신양 배우와 구혜선 배우.
나는 그들을 ‘유명한 사람’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강연 도중,
감정이 북받쳐 말을 잇지 못하는 순간을 보며
나는 알게 되었다.
이들은 성공을 말하러 온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무너졌던 시간을 들고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 진심 앞에서
나는 더 이상 관객이 아니었다.
나 또한 질문받는 사람이 되었다.
“대사 세 마디가 기억나지 않던 그 순간,
왜 저는 비로소 진짜 나를 만났다고 느꼈을까요.”
최선을 다해 달려왔는데
완전히 무너진 자리.
그는 그곳에서 자신을 만났다고 했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몰입하고 있는가.
그 몰입은 나를 넓히고 있는가,
아니면 갉아먹고 있는가.
열정은 방향을 잃으면 상처가 된다.
그러나 방향이 분명하면
고통은 의미가 된다.
박신양/ 그는 배우에서 화가가 되었다.
도망이 아니라 확장이었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붙들었다.
“왜 실패할 게 뻔한 길을 골라 갔을까요.”
그녀는 성공의 이름표를 스스로 떼어냈다.
영화감독, 작가, 화가.
안정 대신 불확실을 선택했다.
사람들은 무모하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말했다.
가장 성공한 것은
끝없이 실패해 본 경험이라고.
나는 실패를 피하려 애써왔다.
그녀는 실패를 축적했다.
“부정의 힘은 강한 긍정의 동력이 됩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사회가 만든 정답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던진 질문의 답을 살고 있는가.
나는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는 일을 좋아한다.
성과는 나를 설명해주는 언어였다.
그러나 그의 한 문장이
나를 멈춰 세웠다.
“성공의 끝에서 만나는 질병은 보상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얼마나 자주
몸의 신호를 미뤄두었는가.
‘조금만 더’라는 말로
나를 설득해왔는가.
그날 이후 나는
성과보다 지속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저는 로봇의 지능이 아니라 다정함을 설계합니다.”
기술은 인간을 대신한다.
그렇다면 남겨진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더 많은 일을 할 것인가.
아니면 더 깊이 살아갈 것인가.
나는 기술사다.
그러나 그날 처음으로
기술이 아니라 삶을 생각했다.
“설명 없이도 당신의 진심은 전달되고 있습니까?”
나는 늘 설명하려 애썼다.
이해받고 싶어서.
그는 설명을 줄이고
구조를 설계했다고 했다.
표정, 리듬, 침묵.
그리고 단 하나의 질문.
“이 장면이 신뢰를 만드는가.”
나는 나의 글을 떠올렸다.
나는 조회수를 원했는가.
아니면 신뢰를 남기고 싶었던가.
강연이 끝난 뒤
나는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물었다.
몰입의 방향을. 정답의 주인을.
몸의 신호를. 남겨질 시간을.
신뢰의 구조를.
그리고 나는 나에게 돌아왔다.
나는 왜 시작했는가.
왜 모임을 만드는가.
왜 배우고 기록하는가.
완벽한 창작은 아직 멀었다.
그러나 나의 경험을 통과한 문장들은
이미 나의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쓴다.
WHY를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
나의 WAY가 누군가의 질문이 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