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기술사의 세 가지 성장 이야기
1. 변화의 언덕 위에 올라서다
초여름의 어느 날, 나는 회사 대강당의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오랜 현장 경험을 가진 자동차 전문가들이 글로벌 모터쇼를 다녀와서 업계의 변화를 정리해주는 자리였다.
어떤 날은 반복되는 회의보다, 이렇게 외부의 시선을 통해 나의 일터를 다시 바라보는 시간이 더 의미 있을 때가 있다.
그날의 주제는 ‘전기차 생태계의 재편’,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의 부상’, 그리고 ‘다가오는 산업의 지각변동’이었다.
기술적 설명도 흥미로웠지만,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그 흐름 뒤에 숨어 있는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이제 자동차는 기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코드와 데이터, 플랫폼과 통합 설계가 핵심이 되고, 기존의 역할과 개념조차 재정의되고 있었다.
강연이 끝날 무렵, 나는 나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이 흐름 위에 올라타고 있는가?
아니면 흐름에 휩쓸릴 준비조차 못 하고 있는가?”
그 순간 깨달았다.
PM이라는 직함은 더 이상 단순한 일정 관리자나 서류 조율자가 아니다.
PM은 변화의 언어를 읽고, 그 흐름을 내부의 실행 전략으로 번역해주는 존재다.
그날 이후, 나는 업무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기 시작했다.
더 이상 눈앞의 일정표만 보지 않았다.
이제는, 흐름의 맥을 읽고 조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2. 내 이야기가 누군가의 나침반이 될 때
며칠 뒤, 나는 본사 회의실 한쪽에서 조촐한 사내 세미나를 열었다.
예전 같았으면 부담스러워 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경험을 나누는 것도 나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연 제목은 따로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의 나의 길을 담담히 풀어내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나는 재료개발 파트에서 고민했던 수많은 밤,
소음 시험실에서 새벽까지 남아 실험 장비를 점검하던 날들,
그리고 지금 PM으로서 여러 부서 사이를 오가며 조율하는 삶까지 천천히 풀어냈다.
말을 하면서 나조차도 잊고 있던 순간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그 기억들이 입을 통해 흘러나오자,
듣고 있던 동료들의 눈빛이 어느새 반짝이기 시작했다.
"PM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은 존재입니다.
각 파트의 전문가들이 자신만의 소리를 내고,
그게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
그 전체 리듬과 균형을 잡는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
강연이 끝나고, 한 후배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선배님 이야기를 들으며 제 시야가 많이 넓어졌습니다.
프로젝트가 ‘일’이 아니라 ‘흐름’이라는 게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그 순간, 나는 마음 깊이 따뜻해졌다.
조용히 걸어온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방향이 될 수 있다는 것.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가, 누군가의 첫 발걸음에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3. 현장에서 다시 숨을 쉬다
며칠 후, 나는 협력사 기술 교류회에 참석하기 위해 연구소를 방문했다.
그곳은 차량의 소음을 줄이기 위한 흡차음재를 개발하는 기업의 R&D 센터였다.
사실 이 분야는 내게 아주 익숙하다.
PM이 되기 전, 나는 10년 넘게 NVH(Noise, Vibration, Harshness) 개발 업무를 해왔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나는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시제품이 진열된 진동 테스트실, 두꺼운 재료를 자르던 소리,
그리고 연구원들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집중력.
모든 것이 낯설지 않았다.
연구소장님, 팀장님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함께 간 기술사 동료들을 소개하며 서로 연결해드릴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전기차 시대에 필요한 소음 저감 기술과 향후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도 오갔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곳에 오면, 뭔가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요."
사무실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생동감,
기술이 실제로 만들어지고 있는 현장의 뜨거운 온도.
나는 다시 한 번 확신했다.
PM은 기술과 사람, 계획과 현장을 연결하는 존재라는 것을.
사람들의 손끝에서 완성되는 그 에너지를 느끼며,
나는 여전히 이 길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에필로그]
나는 기술자이자 PM이다.
현장을 경험했고, 지금은 흐름을 조율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기술과 전략 사이,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조용히 다리를 놓는다.
오늘 내가 걸은 이 길이 누군가의 내일을 위한 이정표가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크지 않아도 괜찮다.
단 한 사람의 눈빛을 밝혀줄 수 있다면,
그 길 위에서 나는 계속 걷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술을 넘고, 사람을 이해하며,
낭만기술사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