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2025년 3월 1일 저녁 TV 뉴스.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3·1절을 기념하는 행사 가운데, 특히 만세 운동을 재현하는 행사 중에는 독립문(?) 앞에서 하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정부의 3·1절 기념식 행사 뉴스를 보다가 문득 몇 년 전과 달라진 것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지만, 몇 가지 내용만 다를 뿐 기념식의 순서와 구성, 특히 기념식의 용어들은 실망스럽게도 거의 변한 게 없었다.
2021년 3월 1일에는 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탑골 공원에서 3‧1 만세 운동 102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었다. 물론 그때도 TV 중계를 통해서 보았다. 다른 해보다는 매우 의미 있게 치러지는 듯해서 흐뭇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독립 유공자들에게 건국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독립 유공자들의 후손이 공동 진행자로 나오기도 하고 해외에 살고 있는 후손들이 독립선언서를 현지 언어로 번역해서 낭송하기도 했다. 다만 일본어 버전으로 낭송할 때는 어색했는데, 나만의 느낌일까?
‘기념(記念/紀念)’은 ‘(어떤 단체나 국가, 인류의 역사에서) 뜻깊고 의미 있는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잊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기 위한 일’이라는 뜻을 지닌 한중일 공용 한자어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일본어에서는 ‘記念’이라고 쓰고, 중국어에서는 ‘纪念’을 쓰는데, 한국어에서는 둘 다 쓰지만 주로 일본처럼 ‘記念’이라고 쓴다. 그렇다고 이 말과 함께 쓰이는 말들이 한중일 세 나라에서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내일은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이다. 기념 선물을 뭐로 하지? 이번 3‧1절 기념식은 어디에서 열리지? 이번 기념사에서는 어떤 내용을 강조할까? 기념 공연이 이어지겠습니다. 행사가 끝나면 기념사진도 찍어야지? 기념행사에서 만세 삼창을 불러?
이 문장들을 어색하게 느끼는 한국인은 별로 없을 듯하다. 하지만 여기에 쓰인 단어들이 대부분 일본식 한자어인 것을 안다면 조금 놀라게 될 것이다.
우선 기념일(記念日)은 기넨비 記念日(きねんび)라는 일본어에서 온 말로, 중국어로도 지니엔르 纪念日[jìniànrì],라고 하지만, 한자가 다르다. 기념 선물〘記念膳物〙의 선물〔膳物〕은 한국식 한자여서 같은 한자 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인데, 중국어로는 지니엔 리우 纪念礼物[jìniàn lǐwù]이고 일본어는 기넨 프레젠토 記念(きねん)プレゼント(present)이다. 참고로, ‘선물〔膳物〕’은 중국어로 리우 礼物[lǐwù]이고, 일본어는 보통 오크리모노 贈物(おくりもの)라고 하지만 영어인 프레젠토 プレゼント(present)를 쓰기도 하고, 여행 선물(기념품)을 가리킬 때는 오미야게 土産(おみやげ)라고 한다.
기념식(記念式)은 ‘어떤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공식적으로 행하는 의식’이라는 뜻의 일본식 한자어 기넨시끼 記念式(きねんしき)’에서 온 말이고, 중국어는 纪念仪式[jìniàn yíshì]이다. 우리말에서는 ‘기념식을 갖다/개최하다(開催―)/거행하다(擧行―)/열다.’처럼 쓰인다. 하지만, ‘3·1절 기념식’이나, ‘광복절 기념식’, 또는 ‘3‧1절 기념식(記念式)에서 만세삼창(萬歲三唱)을 부르다’와 같은 표현은 문법적으로는 맞지만, 상황으로 보면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이유는 뒤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기념 공연(記念公演)은 기넨 고-엔 記念公演(きねんこうえん)이라는 일본어에서 온 말로 중국어는 纪念演出[jìniàn yǎnchū]라고 한다. 기념사진(記念寫眞)은 ‘(어떤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찍는 사진’이라는 뜻의 일본식 한자어인 기넨샤신 記念写真(きねんしゃしん)에서 온 말이고, 중국어는 지니엔 자오피엔 纪念照片[jìniàn zhàopiàn]’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졸업 기념사진(卒業記念寫眞)의 일본어는 소쯔교 기넨샤신 卒業記念(そつぎょうきねん)写真(しゃしん)이고 중국어로는 삐위에 지니엔자오 毕业纪念照[bìyè jìniàn zhào]이라고 한다.
기념행사(記念行事)는 ‘어떤 일을 기념하는 행사. 또는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라는 뜻의 일본식 한자어 기넨 교오시 記念行事(きねんぎょうじ)에서 온 말로, 중국어는 지니엔 훠-동 纪念活动[jìniàn huódòng]이다.
거의 30년 이상을 국어 교사와 한국어 관련 일을 하다가 몇 년 전부터 《한중일 한자어 사전》 작업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에 일본식 한자어가 너무나 많다는 것인데,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도, 연구하는 학자도, 정부도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둘째는, 그 말들 중에서 어떤 말들은 가려서 쓰거나 쓰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적어도 3·1절이나 광복절 기념식에서만큼은 안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말들이 있었는데, 올해 3·1절 기념식에서도 반복되고 있었다. 올해나 몇 년 전이나 3·1절 기념식(記念式)의 순서와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1. 개회 선언【開會宣言】 ㊐ 開会宣言(かいかいせんげん)
2. 국민의례【國民儀禮】(국기에 대한 맹세·애국가 제창·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등) ㊐ 国民儀礼(こくみんぎれい)
…
6. 기념사〘記念辭〙 ㊐ 記念式辞(きねんしきじ); 記念式典式辞.
7. 기념 공연【記念公演】(+어린이 합창단 외), ㊐ 記念公演(きねんこうえん) ·
9. 만세 삼창【萬歲三唱】(마지막 순서) 万歳三唱(ばんざいさんしょう)
만세 삼창을 부르겠습니다. ㊐ 万歳三唱(ばんざいさんしょう)を叫(さけ)びます。
행사의 중요한 내용이나 순서가 기념사(記念辭)를 제외하고 대부분 일본식 한자어로 되어 있다. 기념식과 같은 공식적인 행사는 먼저 개회 선언을 하고 국민의례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개회 선언’이나 ‘기념 공연’은 일본식 한자어지만 달리 다르게 바꿔 쓸 말이 없는 게 현실이고, 기념사(記念辭)는 ‘(기념식을 하는 대상에 대한) 기념하는 뜻을 표하는 말(또는 글)’의 한국식 한자어로, 중국어로는 지니엔지츠 纪念致辞[jìniàn zhìcí]라고 하고, 일본어에서는 보통 기넨시끼지 記念式辞(きねんしきじ)라고 한다.
국민의례(國民儀禮)는 일본어 고꾸민기레 国民儀礼(こくみんぎれい)에서 온 말로, 1941년 일본 기독교단이 정한 의례 양식이다. 일본에서는 ‘미야기 요배(궁성을 향하여 절하는 것), 기미가요(일본 국가) 제창,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제정 당시에는 신사 참배였음)…’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그것과 거의 똑같다(国民儀礼とは、1941年に日本基督教団が定めた儀礼様式のことで、具体的には「宮城遥拝、君が代斉唱、神社参拝」である。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https://ja.wikipedia.org). 이 말이 박정희 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 70~80년대의 군사 독재 시대를 지나 오늘날까지도 똑같은 이름과 비슷한 형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3·1절 행사(?)나, 광복절 기념식(?) 등 일제에 항거하거나, 일제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국가 공식적인 행사에서조차 이 말을 쓰는 것은 어딘지 모순된 느낌이다.
행사 마지막은 대부분 “만세”를 세 번 부르는 차례가 있고 이번에도 그렇게 했다. 무엇보다 문제가 된다고 여겨지는 것은 바로 만세 삼창(萬歲三唱)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반자이 산쇼 万歳三唱(ばんざいさんしょう) ‘만세를 세 번 외치다’라는 뜻의 일본식 한자어인데 만세 삼창(萬歲三唱)은 그것을 우리말 발음(한자음)으로 바꾼 것이다. 3‧1독립 만세 운동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굳이 일본식 한자어를 써야 할까? 적당한 말이 없다면 “대한 독립 만세”를 세 번 크게 외치자고 하거나, “만세를 세 번 큰 소리로 외치겠습니다”라고 해도 될 듯하다.
올해는 3‧1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 지 106주년이 되는 해이다. 106년 전에도 ‘만세 삼창(萬歲三唱)’이라는 말을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는 그렇게 표현되는 것을 보면 언어 의식이 없어 보인다.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를 표현하고자 할 때조차 일본식 한자어를 사용하는 것도 모자라, 그로부터 100년이 넘게 지나고 해방 8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같은 표현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올해는 더구나 “독립 만세 운동” 재현 행사를 ‘독립문(獨立門)’ 앞에서 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숭고함이나 경건함이 아니라 어색하고 웃음이 나오기까지 했다. 옛 서대문 형무소 근처에 있는 독립문은 일제로부터의 독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독립협회가 일본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을 받아서 1897년 11월 20일(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되기 13년 전)에 지은 것으로, 중국(당시는 청나라)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자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기념(記念/紀念)(-하다) n. (뜻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함. 또는 그것을 위한 행동. 한국어와 일본어에서는 ‘記念’이라고 쓰고, 중국어에서는 ‘纪念’을 씀.
중국어: 纪念[jìniàn]; 留念
일본어: 記念(きねん)
예) 결혼 기념(結婚紀念); 결혼을 기념하다(紀念―). 졸업 기념【卒業紀念】[조럽끼·]; 졸업을 기념하다(記念―). 기념관(記念館/紀念館) 纪念馆[jìniànguǎn]. 기념물(記念物/紀念物) 纪念物[jìniànwù], ㊐ 記念物(きねんぶつ). 기념비(記念碑/紀念碑) 纪念碑[jìniànbēi], ㊐ 記念碑(きねんひ). 기념우표(記念郵票) 记念邮票[jìniàn yóupiào]. 기념주화【記念鑄貨】 纪念币[jìniànbì], ㊐ 記念鋳貨(きねんちゅうか). 기념탑(記念塔·紀念塔) 纪念塔[jìniàntǎ], ㊐ 記念塔(きねんとう); メモリアルタワー(memorial tower). 기념품【記念品(きねんひん)】 纪念品[jìniànpǐn], ㊐ おみやげ[御土産]. 기념품 가게〘記念品―〙[…-까‧]=기념품점(記念品店) 纪念品商店[jìniànpǐn shāngdiàn], ㊐ 土産店(みやげてん)
기념사〘記念辭〙 n. (기념식을 하는 대상에 따라) 기념하는 뜻을 표하는 말. 또는 글.
중국어: 纪念致辞[jìniàn zhìcí]
일본어: 記念式辞(きねんしきじ); 記念式典式辞.
예) 대통령께서 3.1절 기념사를 하시겠습니다. 창립 106주년 기념사, ㊐ 創立106周年記念式典式辞
기념 사업【記念事業】 n.
중국어: 纪念事业[jìniàn shìyè]
일본어: 記念事業(きねんじぎょう).
예) 기념 사업을 벌이다.
기념일【記念日】[기녀밀] n. 어떤 일을 기념하는 날.
중국어: 纪念日[jìniànrì]
일본어: 記念日(きねんび)
ex) 개교기념일【開校記念日】 建校纪念日[jiànxiào jìniànrì], ㊐ 開校記念日(かいこうきねんび). 결혼기념일【結婚記念日】 结婚纪念日[jiéhūn jìniànrì], ㊐ 結婚記念日(けっこんきねんび).
기념행사【記念行事】 n. 어떤 일을 기념하는 행사. 또는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
중국어: 纪念活动[jìniàn huódòng]
일본어: 記念行事(きねんぎょうじ)
예) 창립 기념행사【創立記念行事】[-닙끼…] 成立纪念活动[chénglì jìniàn huódòng] ㊐ 創立記念行事(そうりつきねんぎょうじ)
국민의례【國民儀禮】[궁미늬례/레]: (국기에 대한 경례·애국가 제창·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등) 공식적인 의식에서 국민으로서 갖추어 해야 할 격식(格式).
중국어: 国民礼仪[guómín lǐyí]; 国民行礼[guómín xínglǐ]
일본어: 国民儀礼(こくみんぎれい)
예) 국민의례【國民儀禮】를 시작하겠습니다. 국민의례【國民儀禮】를 거행하다(擧行―). 举行国民礼仪。jǔxíng guómín lǐyí. ㊐ 国民儀礼を執り行う[toriokonau]。
만세 삼창【萬歲三唱】(-하다)[만ː…]
중국어: 三呼万岁。sān hū wànsuì.
일본어: 万歳三唱(ばんざいさんしょう)
예) 만세 삼창을 부르다. ㊐ 万歳三唱(ばんざいさんしょう)を叫(さけ)ぶ。☞‘만세를 세 번 외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