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편〔形便〕과 처지〔處地〕, 사정【事情】과 여건【與件】

한자어가 보여주는 현실과 세계에 대한 인식: 일본식 한자어의 의미 분화

한국어에는 사람이나 사물, 혹은 사태가 놓여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형편〔形便〕’과 ‘처지〔處地〕’, ‘상황(狀況)’과 ‘입장(立場)’, 그리고 ‘사정【事情】’과 ‘여건【與件】’은 일상에서는 비슷하게 쓰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가리키는 대상과 의미의 층위, 화자의 관점과 태도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먼저 형편〔形便〕과 처지〔處地〕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쓰지 않는 한국식 한자어로, 개인의 삶과 밀접한 말이다. 형편은 주로 경제적 생활 상태를 가리키며, 넉넉함이나 곤궁함에 대한 화자의 판단과 평가를 내포한다. “집안 형편이 어렵다”와 같은 표현에서 보듯, 형편은 객관적 사실의 서술보다 체감되는 생활 상태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반면 처지는 개인이 놓인 위치나 관계, 사회적 조건을 강조하는 말이다. “내 처지를 고려하다”, “그의 처지를 생각해 보라”에서처럼 처지는 공감과 이해의 뉘앙스가 강하다. 두 단어 모두 개인 중심의 정서적 색채가 비교적 강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에 비해 상황(狀況)과 입장(立場)은 판단과 대응을 드러내는 전통적 한자어이다. 상황은 특정 시점에 전개되고 있는 외적 상태나 사태의 흐름을 비교적 중립적으로 표현할 때 쓰인다. “상황이 급변했다”, “현재 상황이 어렵다”와 같이 사태 자체의 전개와 조건에 초점이 있다. 반면 입장은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태도, 또는 판단의 출발점을 가리키는 말로, 항상 판단 주체의 존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상황과 구별된다. “입장을 밝히다”, “나의 입장과 상대방의 입장”, “나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처럼 개인의 견해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입장”, “정부의 입장”, “학교 측의 입장”과 같이 집단적·제도적 주체와 결합해서도 쓰인다. 즉, 입장은 객관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 상태를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하는가를 드러내는 주체 중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정【事情】과 여건【與件】은 둘 다 어떤 행위의 배경을 설명할 때 쓰이는 일본식 한자어지만, 의미상으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먼저, 사정은 어떤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나 개인적 사유를 가리킨다. “사정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에서 사정은 행위의 원인을 설명하는 말이며, 개인적 사유나 불가피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사정은 특정 행위에 대해 설명하거나 양해를 구할 때 쓰는 경우가 많다. 반면 여건은 특정 행위와 관련된 객관적 전제나 주어진 조건을 가리킨다. ‘교육 여건’, ‘근무 여건’, ‘재정 여건’과 같은 표현에서 보듯, 여건은 개인보다 제도·환경·구조와 밀접하다. 여건은 ‘좋다’거나 ‘나쁘다’고 평가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사정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말이라면, 여건은 “무엇이 가능하거나 제한되는가”를 판단하는 말이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여건은 행정·정책·보도 담론에서 자주 쓰인다.

한국어에서 쓰이는 여건의 의미와 용법은 일본어와 중국어와의 대비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한국어의 여건은 형편이나 처지처럼 개인의 삶에 밀착된 말도 아니고, 사정처럼 개별적 이유를 설명하는 말도 아니다. 그것은 특정 행위나 정책, 제도가 성립하기 위해 전제되는 조건들의 총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형편〔形便〕과 처지〔處地〕, 상황(狀況)과 입장(立場), 사정【事情】과 여건【與件】은 모두 어떤 행위나 판단을 둘러싼 배경이나 상태를 가리키지만, 각 어휘는 무엇을 중심에 두고 현실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분명히 구분된다. 형편〔形便〕과 처지〔處地〕는 개인의 삶에, 상황(狀況)과 입장(立場)은 판단과 대응에, 사정【事情】과 여건【與件】은 개인 또는 제도와 구조의 차원인지에 초점이 있다. 이러한 차이는 한국어의 의미 체계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로서, 개인의 삶, 사태의 전개와 판단의 주체, 제도나 구조적 조건이라는 서로 다른 층위를 세밀하게 구분하여 어휘화해 왔음을 보여 준다.


한중일 3국의 비교

먼저, 일본어에서 ‘사정【事情】, ㊐ 事情(じじょう)[jijō]’은(는) ①처지〔處地〕·형편〔形便〕, ②이유(理由), 곡절(曲折) ③호소(呼訴)의 뜻을 가진 명사로만 쓰이는데 반해, 한국어에서는 이런 뜻의 명사 외에 ‘인정(人情)과 사정【事情】’을 합하여 ‘인정사정〘人情事情〙(-없다)’의 형태로도 쓰이고, ‘-하다’와 결합하여 ‘사정하다(事情―), 사정사정하다〘事情事情―〙, 통사정하다〘通事情―〙’의 형태로‘호소하다(呼訴―); 부탁하다(付託―); 간구하다(懇求―)’라는 뜻의 동사로도 쓰인다.

또, 한국어에서 여건【與件】은 ‘주어진 조건·환경·기반’을 포괄하는 말로 확장되어 쓰이고 있지만, 일본어의 与件(よけん)[yoken]은 주로 논리학·철학에서 사고나 분석의 전제로 주어진 조건을 뜻하는 학술어로 사용 범위가 제한된다. 따라서 한국어의 ‘교육 여건’, ‘재정 여건’을 일본어로 옮길 때는 教育条件(교육 조건), 財政状況(재정 상황)과 같이 조건이나 상황 또는 상태라는 말이 자연스럽고, 教育与件(교육 여건), 財政与件(재정 여건)과 같은 표현은 일반적으로 쓰지 않는다. 중국어에서도 주로 条件(조건), 环境(환경), 状况(상황) 등으로 바꾸어 표현한다.



형편〔形便〕 n. ① 일이 되어 가는 모양이나 형세(形勢). ② 살림살이나 경제적 상황(狀況). ≒형세(形勢); 상황(狀況); 사정【事情】

㊥ 情况[qíngkuàng]; 状况[zhuàngkuàng], 形势[xíngshì], ㊐ 事情(じじょう).

예) 일이 돌아가는 형편을 살피다. 형편이 어렵다. 형편이 어려워지다. 형편이 좋지 않다. 형편이 좋아지다. 가정 형편〘家庭形便〙 家况[jiākuàng], 家境[jiājìng]. 형편에 맞게 행사를 치르다. 집안 형편이 어렵다. ㊐ 家庭(かてい)の事情が苦(くる)しい; 家の都合(つごう )が厳(きび)しい。형편상〔形便上〕 因(为)…情况[yīn(‧wèi)…qíngkuàng]; 由于…情况[yóuyú…qíngkuàng], ㊐ 事情(じじょう)で; 事情上; 都合で; 都合上(つごうじょう); 状況(じょうきょう)から(して). 형편과 관계된 측면. =형편이 좋지 않아서. {어법} (주로 부정 서술어와 함께 쓰여) 부정적 상황을 나타냄. =형편에 따라; 형편과 관계된 이유로.


처지〔處地〕① [처ː‧] n. 현재 처한 상황(狀況)이나 형편〔形便〕. =입장(立場)[-짱]. 立场[lìchǎng], ㊐ 立場(たちば).

㊥ 处境[chǔjìng], 情况[qíngkuàng], ㊐ -; 立場(たちば); 状況(じょうきょう).

예) 처지가 딱하다. 가련한 처지〔處地〕. 내 처지가 말이 아니다. 얻어먹는 처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다.

cf) <참> 신세(身世) 身世[shēnshì], ㊐ 身(み)の上(うえ); 境涯(きょうがい): ①(가련하거나 외롭거나 가난한 경우 등) 사람이 처한 형편이나 처지. ② 남에게 도움을 받거나 폐를 끼치는 일.

처지〔處地〕② [처ː‧] n. 서로 사귀어 지내는 관계.

㊥ 关系[guān‧xi], ㊐ -; 間柄(あいだがら).

예) 서로 아는 처지에 모른 체 할 수 없다.


상황(狀況) n. 일이 되어 가는 형편〔形便〕이나 모양(模樣). ≒형세(形勢), 형편〔形便〕, 사정【事情(じじょう)】.

㊥ 状况[zhuàngkuàng] ; 情况[qíngkuàng] ㊐ 状況(じょうきょう).

예) 비상 상황【非常狀況[状況](ひじょうじょうきょう)】[비ː…] 紧急状况[jĭnjí zhuàngkuàng]. 불가피한 상황【不可避(ふかひ)+_하- +_ㄴ狀況(じょうきょう)】 不可避免的情况。bùkě bìmiǎn‧de qíngkuàng. ㊐ 不可避(ふかひ)の状況(じょうきょう). 상황 변화(狀況變化); 상황이 변하다(變―).=상황이 바뀌다. 状况变化[zhuàngkuàng biànhuà]; 情境变化[qíngjìng biànhuà], ㊐ 状況(じょうきょう)の変化(へんか); 状況が変(か)わる。 change of ctatus. 상황 보고【狀況報告】; 상황을 보고하다(報告―). 情况报告[qíngkuàng bàogào], 形势报告, ㊐ 状況報告(じょうきょうほうこく); 状況を報告(ほうこく)する。상황 분석(狀況分析); 상황을 분석하다(分析―). 状况分析[zhuàngkuàng fēnxī], ㊐ 状況分析(じょうきょうぶんせき); 状況を分析(ぶんせき)する。상황 설명(狀況說明); 상황을 설명하다(說明―). 状况说明[zhuàngkuàng shuōmíng] ; 情况说明, ㊐ 状況説明(じょうきょうせつめい); 状況を説明(せつめい)する。상황실【狀況室】 (行政上或军事上的)情况室[qíngkuàng shì]; 指挥室[zhĭhuī shì], ㊐ 状況室(じょうきょうしつ). situation room. (행정상 또는 작전상의 계획, 통계, 상황판 등을 갖추어) 전반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마련한 방.

cf) ‼한국어와 일본어뿐만 아니라 중국어에서도 ‘상황(狀況)’과 ‘정황(情況)’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쓰이는데, 일본어는 아예 그 의미뿐만 아니라 발음도 같다. じょうきょう[状況·情況].


입장2(立場) [-짱] n.

㊥ 立场[lìchǎng], ㊐ 立場(たちば). stance; position.

예) 긍정적 입장을 보이다. 表明肯定性的立场。biăomíng kĕndìng xìng de lìchăng. 부정적 입장을 밝히다. 表明否定的立场。biăomíng fŏudìng de lìchăng. 입장을 정하다. 입장을 취하다. 입장이 곤란하다. 입장이 곤란해지다.

cf) <참고> 영어 ‘stance; position’의 일본식 번역어임. 국립국어원에서 ‘처지〔處地〕, 형편〔形便〕’으로 바꿔 써야 할 말로 제시한 말이지만, 의미나 뉘앙스가 ‘처지〔處地〕, 형편〔形便〕’과 다른 경우도 있을 뿐만 아니라(예: 긍정적/부정적 입장), 중국어에서도 통용되는 한중일 공용 한자어임.


사정1【事情】① [사ː‧] n. 일이 되어 가는 형편이나 처한 상황. ≒상황(狀況); 형편〔形便〕; 처지〔處地〕.

㊥ 情况[qíngkuàng]; 状况[zhuàngkuàng], ㊐ 事情(じじょう).

예) 인정사정없다. 狠辣[hěnlà]. 사정없이 때리다.

사정1【事情】② [사ː‧] n. 어떤 행동을 한 까닭. ≒이유(理由); 곡절(曲折)[-쩔]; 까닭.

㊥ 理由[lǐyóu]; 缘由[yuányóu], ㊐ 事情(じじょう).

예) 무슨 사정이 있겠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사정1【事情】③(-하다) [사ː‧] n. 어떤 일의 형편이나 까닭을 남에게 말하고 무엇을 간청함.

㊥ 恳求[kěnqiú], 恳请[kěnqǐng] ㊐ 事情(じじょう).

예) 사정을 해 봐야겠다.

cf) ‼일본어 ‘事情(じじょう)’는(은) ① 처지〔處地〕·형편〔形便〕, ② 이유(理由); 곡절(曲折); 까닭 ③ 호소(呼訴)의 뜻을 가진 명사로만 쓰이는 데 반해, 한국어의 사정【事情】은 이런 뜻의 명사 외에 ‘인정(人情)과 사정【事情】’을 합하여 ‘인정사정〘人情事情〙(-없다)’의 형태로도 쓰이고, ‘-하다’와 결합하여 ‘사정하다(事情―), 사정사정하다〘事情事情―〙, 통사정하다〘通事情―〙’의 형태로‘호소하다(呼訴―); 부탁하다(付託―); 간구하다(懇求―)’라는 뜻의 동사로도 쓰임.


여건【與件】① [여ː껀]ⓣ n. 주어진 조건. =환경(環境)② 环境[huánjìng]. 예) 교육 환경 教育环境[jiàoyù huánjìng], ㊐ 教育環境(きょういく かんきょう).

㊥ 条件[tiáojiàn]: 现有条件[xiànyǒu tiáojiàn], ㊐ 与件(よけん); 環境(かんきょう); 条件(じょうけん).

예) 여건이 좋지 않다[여ː꺼니#조ː치안타].=여건이 나쁘다. 여건을 개선하다(改善―). 교육 여건〘敎育與件〙[교ː융녀껀] 教育条件(제도, 시설, 인력, 재정 등); 教育环境(물리적·사회적 환경), ㊐ 教育条件(きょういく じょうけん); 教育環境(きょういく かんきょう). 작업 여건〘作業與件〙[자검녀껀]=작업 환경【作業環境】; 노동 조건(勞動條件)[‥-껀] 工作条件[gōngzuò tiáojiàn]; 劳动条件[láodòng tiáojiàn], ㊐ 作業条件(さぎょう じょうけん); 作業環境(さぎょう かんきょう), work requirements. 재정 여건〘財政與件〙[‥-껀]=재정 형편〘財政形便〙; 재정 상태【財政狀態】 财政条件[cáizhèng tiáojiàn]; 财政状况[cáizhèng zhuàngkuàng], ㊐ 財政状況(ざいせい じょうきょう); 財政状態(ざいせい じょうたい).

cf) !한국어에서는 일상어로도 널리 쓰이는 일본식 한자어지만, 일본어에서는 논리학이나 철학의 전문 용어로 주로 ‘사고·판단·분석의 전제로 주어지는 조건’의 뜻으로 쓰임이고, 때로는 경제 외적 제반 조건의 뜻으로도 쓰임(与件(よけん)(論理学・哲学) 思考・判断・分析の前提として与えられる条件. 출처: 『広辞苑』. 経済外的諸条件のこと。日本大百科全書).

여건〔與件〕② [여ː껀]ⓣ n. 당시에 처한 상황이나 형편. 또는 닥친 상황이나 형편. =상황(狀況); 형편〔形便〕

㊥ 条件[tiáojiàn] : 现有条件[xiànyǒu tiáojiàn], ㊐ 環境(かんきょう); 条件(じょうけん).

예) 여건이 되면 하겠지만, 여건이 안 되면 어쩔 수 없지요. 여건을 봐서 실시하기로 하다.

금요일 연재
이전 07화진면목(眞面目)과 진가【眞價】, 본령【本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