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현재)

by 프렌치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오후는 의외로 평온했다.


우중충했던 여느 때와 달리 오랜만에 눈부신 햇살이 교정을 비추고 있었다.


학생들은 교내 공원에 끼리끼리 모여 작은 모임을 갖고 있었다.


캐치볼 하는 남학생들도 보였고 수다 떠는 여학생 무리도 있었다.


모두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기계공학과 교수 피터 아놀드 역시 창문 밖으로 비치는 햇살에 못 이겨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는 최근 연구 때문에 꽤나 애를 먹고 있었다.


연구 발표가 2주 앞으로 다가왔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상태였다.


이미 10만 파운드나 되는 막대한 재정보조를 받은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눈에 보일만 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그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이 뻔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교수들, 특히 대학 측으로부터 연구 보조를 받는 교수들은 사실 큰 압박을 받은 채 연구를 감행하고 있다.


혹시나 연구에 실패하게 된다면 그의 명성에 흠집이 나게 될 것이다.


또 그다음 연구기획에도 큰 차질이 생긴다.


그래서 결과 발표 데드라인이 2주 정도 앞으로 다가오게 되면 육적으로나 심적으로 여유가 없게 된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잠시나마 케임브리지에서 소소한 행복이라도 느껴보고 싶었다.


조교에게 일을 맡긴 뒤 가운을 벗고 밖으로 나온 그는 아무 말 없이 교정을 둘러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해왔던 실험과 연구, 성과 등을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그는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알아줄 만큼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지만, 매번 연구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항상 큰 압박을 느꼈다.


오히려 처음 아무것도 없이 연구했을 때가 즐거웠던 것 같았다.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계 최고의 과학자가 10만 파운드나 되는 막대한 돈을 들인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치지 못한다면 그의 명성은 추락할지도 모른다.


문득 20여 년 전 함께 즐겁게 연구를 했던 옛 동료가 생각났다.


그 친구는 매우 독특한 친구였다. 대학이나 학계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자신의 연구를 했던 자신의 동료가 생각이 났다.


‘그 친구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20여 년 전 케임브리지에서 가장 유망한 과학자로 뽑혔던 피터 아놀드 박사와 그의 동료는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한 명은 케임브리지에 남아서 세계 최고의 과학자로 성공했지만 다른 한 명은 어디에 있는지 소식조차 들을 수 없다.


아놀드는 시간이 될 때마다 자신의 친구에 대한 소식을 수소문하고는 했다.


그는 학교 측과 심하게 다툰 뒤 휴직계를 낸 후 20여 년째 돌아오지 않았다.


혹여나 그 친구가 제3세계 대학교에서 강의를 가르치고 있지는 않을까 찾아봤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학계 세미나에 가서도 제일 먼저 그 친구의 이름을 찾고는 했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에 대한 기억도 어느새 추억이 되어버렸다.


‘오랜만에 그 녀석이 생각나는구먼. 나도 그때 그냥 같이 학교를 나올 걸 그랬나?’


자신의 친구는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하겠다며 학교를 등지고 떠나 버렸지만, 그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지금 그가 성취한 많은 것을 되돌아보면 후회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씩 그가 부럽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이렇게 답답할 때 함께 자유를 느끼며 그와 함께 연구했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조용히 교정을 바라보던 그의 시야에 낯선 동양인과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멀리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동양인의 얼굴은 낯이 익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피터 아놀드 박사님 맞으시죠? 저는 하버드의 안요환 박사입니다.”


잘못하면 MIT라고 말할 뻔했다.


요환은 아직도 자신이 하버드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자기를 소개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MIT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오! 안 박사. 자네에 대해서 학술지에서 자주 보고는 했지. 어쩐지 낯이 익는다 했어. 여기는 어쩐 일인가? 하버드에 있어야 할 사람이 갑자기 영국에는 무슨 일로 왔는가?”


아놀드는 요환과 초면이었다.


다만, 최근 학술지를 보면서 사진을 통해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특히 학술지 칼럼란에 기재된 자신의 연구에 대한 열정을 표현한 요환의 글은 그의 옛 친구를 연상시켰다.


그의 머릿속에 요환이라는 동양인 과학자에 대한 기억이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교수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 일단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세나. 갑자기 자네가 나를 찾아와서 어리둥절하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교수님.”


말을 마친 요환은 셀레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셀레나, 당신은 여기 좀 있을래요?”


셀레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부인인가?”


갑작스러운 아놀드의 질문에 요환은 얼굴을 붉혔다.


“아, 아닙니다.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당황한 기색으로 요환이 대답하자, 셀레나도 머쓱한 듯 손가락으로 애꿎은 머리카락을 베베 꼬았다.


“괜찮네, 우리와 같은 과학자들은 너무 머리를 많이 써서 탈이라네. 무슨 말인지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가슴도 조금 쓰란 말이야. 사람이 이성적으로만 살지 말고 감정적으로 살아야지. 사랑이야 말로 신이 주신 최고의 감정 중 하나거든.”


“박사님, 정말 함께 일하는 사람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아놀드는 호탕하게 웃으며 셀레나에게 말했다.


“지금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도 용서해 주시구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원래 다 그렇다네.”


“박사님, 죄송한데 정말로 저는 안 박사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입니다.”


셀레나도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미안하네, 내가 좀 짓궂게 굴었나 보군. 하지만 둘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나는 이렇게 동서양인이 잘 어울리는 커플은 처음 본다네. 어쨌거나 그럼 그쪽도 함께 들어오시게나.”


요환과 셀레나를 자신의 오피스로 안내하면서 다시금 그의 옛 친구가 떠올랐다.


‘스캇, 오늘따라 자네 생각이 많이 난다 싶더니, 여기 자네를 꼭 닮은 후배 과학자가 나를 찾아왔다네.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보고 싶네,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