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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이애비 Nov 10. 2022

아이를 키우며, 아버지를 이해한다

"내 어린 시절 그때의 아버지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일정 간격을 두고 평행선을 달렸다. 즉, 접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관계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우선 유아기 시절 아버지는 나와의 친밀감 형성에 실패했다. 세 살 전까지는 시골의 할머니 손에 키워졌고, 이후에 서울로 부모님이 나를 데려와 단칸방에서 함께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먹고살기 바빴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집에 잘 안 계셨다. 당연히 그 시절 흔한 추억도 없다. 예를 들면 아버지와 목욕탕에서 목욕하고 먹는 바나나우유 맛 같은 추억 말이다. 생각해보니 목욕탕에서 바나나우유를 먹긴 먹었다. 하지만 그 자리엔 아버지가 없고 이모부가 있었다. 물고기를 잡으러 계곡에 갔을 때도 이모부와 함께였다. 아버지는 내 어린 시절 추억 속에 자리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나는 세 살 아이를 키우며 친밀감을 형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눈치가 보이더라도 일찍 퇴근하여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최대한 늘리고자 했다. 아이와의 친밀감 형성은 함께 하는 시간과 비례한다고 믿고 있다.


  학창 시절엔 더 데면 데면 했다. IMF로 작게나마 일궈놓으신 아버지 사업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우리 가계는 빚덩이만 남았다. 나는 집에 빨간딱지가 붙을까 봐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사업실패로 방황하는 아버지가 밖에서 술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었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와 항상 싸움을 하셨고, 폭력을 행사하는 날들도 있었다. 나는 내 방 구석에서 그 소리를 최대한 듣지 않으려고 처절하게 귀를 막았다. 나까지도 피해가 올까 무서웠지만, 아버지는 아무리 술 취해도 나까지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그저 잔소리만 몇 번 늘어놓는 정도였다.


"넌 공부만 열심히 해라..."


아버지는 시골에서 3남 2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가정형편 상 학업을 이어가기 힘들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 어렸을 때 열차 사고가 나서 두 다리를 잃으셨고, 아버지도 중학생 때 생계유지를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일터로 나가셨다. 그 시절 공부를 배우지 못한 한이 남아 있는 듯했다. 아버지는 그때 공부만 열심히 했더라도 지금보다 인생이 더 나았을 거라고 후회하고 있었다. 공부만 열심히 하라는 아버지의 말은 자식의 학창 시절만큼은 후회가 남지 않도록 공부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하라는 그런 의미를 포함하는 말이었다. 그 시절엔 왜 자꾸 공부 얘기만 하는지 짜증도 났었지만, 지금 사회생활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아버지가 살아온 삶을 어림짐작 해보니, 그 깊은 의미를 이젠 이해할 수 있다.


  학창 시절이 지나 대학교 진학 후엔 아버지도 더 이상 공부 얘기는 하지 않으셨다. 나름 아버지가 만족할만한 대학에 진학하였기도 했고, 등록금을 내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 내 미래를 담보하여 정부에서 학자금 대출을 받았기 때문이다. 술을 마실 수 있게 되고, 군대를 제대하자 아버지는 나를 드디어 어른으로 인정해준 듯했다. 그때는 살짝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큰 사건 하나로 더욱 틀어지게 되었다. 나는 이미 예상은 했지만, 결혼을 앞두고 집에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다. 지금의 아내도 그 사정을 알고 있었고 나는 주변 사람들에 비해 형편없이 결혼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 아버지를 더욱 원망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쌓인 감정까지 모두 담아 어느 날 아버지 앞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사업만 안 하고, 남들처럼 직장 생활만 꾸준히 했더라면 내가 지금껏 이렇게 비굴하게 살진 않았을 거야! 해준 것도 없으면서 내 결혼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나도 이제 서른이란 나이에  머리가 컸다고 심하게 대들었고, 이때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울면서 집을 나가셨다. 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 보는 아버지 우는 모습에 후회가 밀려왔다. 결국 내가 먼저 사과를 했지만, 6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장면이 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특히나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내가 스스로 혼자 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기억을 못 할 뿐이지 똥오줌 못 가렸을 때부터 나는 아버지의 젊음을 갉아먹으며 자라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며 아버지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가 손녀딸을 볼 때 눈에 꿀이 떨어지는 모습을 자주 본다. 손녀딸이라서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들인 내가 어렸을 때도 꿀은 아니더라도 부드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셨으리라. 그때의 난 그런 아버지의 비언어적 몸짓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여느 가부장적인 옛날 아버지처럼 무뚝뚝하게 말하는 엄한 모습만 기억할 뿐이었다. 아이를 낳아 키우며 내가 딸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들 아버지도 어린 나를 보면서 똑같이 느꼈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 아이를 낳으면 효자가 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도 같았다. 이제야 내 어린 시절 그때의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앞으로 아이가 더 자랄수록  아버지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질 거라는 생각에 먹먹한 기대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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