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10년 가까이하면서 어느 정도 완화되긴 했지만, 아직도 '어른 공포증'이 날 괴롭힐 때가 있다. 어른 공포증이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두렵고 대하기 힘든 증상을 의미한다. 난 어쩌다 이런 증상이 생겼을까? 대부분 어른 공포증을 겪는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의 어린 시절의 '원 체험'이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것이라 예상해본다. 나의 어린 시절의 선천적인 특성은 부모님의 말을 잘 듣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했다. 게다가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서 어떠한 상황과 누군가의 말에 휘둘리기 쉬운 성향이었다. 이런 타고난 성향도 한몫하지만, 사실 나는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어른 공포증'이 극심해졌다고 본다.
어린 시절 나의 아버지는 그 시절의 여느 아버지와 같았다. 그때 당시 가정을 지킨다는 것은 밖에 나가 돈 벌어서 처자식이 굶게 하지 않는 생존의 문제였다. 그런 아버지는 지방 곳곳을 트럭을 몰고 다니시며, 집에 들어오는 일이 잘 없었다. 당연히 어린 나는 그런 아버지를 어색해했고,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아버지 또한 오랜만에 집에 오시면 친근하게 아들을 대하면 좋았을 텐데, 그 시절 평범한 아버지처럼 무뚝뚝하고 말이 없으셨다. 그런 관계 속에서 아버지가 무너진 날이 있었다. 바로 1997년 IMF로 위기를 겪었을 때였다. 나는 그때 고작 10살이었지만, 아버지가 무너진 모습을 뚜렷이 기억한다. 사업을 벌이다가 빚더미에 떠 앉고, 친척들에게 빚 독촉을 받았던 일들, 아버지가 술 마시고 어머니와 큰 소리로 싸웠던 일들, 나를 그 상황에서 엇나가지 않게 하려고 호되게 야단쳤던 일들이 점차 내 어린 시절을 잠식해갔다. 몇 년을 방황하신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야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그 사이 나는 아버지와 부정적 관계 속에서 모든 사건들이 트라우마로 남아 '어른 공포증'이 자리했다. 내가 유독 여자 어른보다 남자 어른을 더 부담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인 듯싶다.
이런 어른 공포증으로 인해서 나보다 어른이라는 인식이 생기면, 말 수가 줄어들고 행동이 어색해졌다. 어른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어야 했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야 했다. 이런 어른 공포증을 갖고 어른이 되면,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주저하게 되고, 소극적인 태도를 갖게 한다. 당연히 회사에서는 이런 모습을 좋게 볼리 없고, 사회 부적응자라는 인식이 생기기도 한다. 나도 처음 신입사원으로 회사에 입사했을 때 동기들과 교육하는 동안은 모든 행사를 적극적으로 해냈다. 하지만 부서 배치를 받고 나서는 팀의 다양한 어른들의 기에 눌려 나뭇가지처럼 딱딱해졌다. 업무 실수로 인해 조금 혼이 나더라도 나에겐 공포로 다가왔고, 상사들의 표정을 살피고 눈치를 보느라 식은땀을 흘렸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사회생활까지도 악영향을 주고 있던 것이다.
이런 힘겨운 직장 생활을 이어오다 보니 깨달은 게 하나 있다. 모든 어른이 아버지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잔뜩 쪼그라든 나에게 먼저 다가와 친근하게 아침 잘 챙겨 먹고 다니는지 안부를 묻는 어른도 있었고, 본인의 신입사원 시절에 사고 쳤던 일들을 재미있게 풀어주는 어른도 있었다. 업무 실수를 했을 때 커피 한잔 사주며 힘내라는 응원을 보내준 어른도 있었고,회식자리에서 먼저 망가지며 분위기를 띄우는 어른도 있었다. 이런 어른들을 겪고 나니 '생각보다 좋은 어른들이 많구나!'라는 긍정적인 경험들이 쌓여갔다. 게다가 아버지도 이제 나이가 들면서 기력이 허해지신 건지, 더 이상 본인의 얼굴을 굳이 힘주어 딱딱하게 만들지 않았다. 이제 세월의 흐름 속에 본인을 맡기는 편안한 모습이었고, 더 이상 나에게 어떠한 훈계나 질타를 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버지와 술을 많이 마셨다. 우린 이제야 술의 힘을 빌어 가까워진 부자 관계가 되었다. 그렇게 점차 난 사회생활 속에서 만난 좋은 어른들에 대한 경험과 누그러진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어른 공포증'이 희미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나도 직장생활을 10년 정도 하고 나니, 회사에 후배들이 꽤 많아졌다. 좋은 어른들이 내 '어른 공포증'을 사그라들게 해 줬던 것처럼 후배들을 대할 때 좋은 선배로서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후배가 어른 공포증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마음가짐을 갖고 대하면 후배들과 가까워지는 데 도움이 된다.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 힘든 일을 겪었을 때 커피와 술로 달래주고, 먼저 내 개인 생활을 얘기하며 망가지기도 하고, 신입사원 시절에 사고 쳤던 일들 그리고 지금도 사고 치고 있는 일들을 시원하게 얘기하기도 한다. 다른 이들에게 좋은 어른이 되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이제는 희미해진 '어른 공포증'을 완전히 내 인생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인 것 같단 생각도 든다.
나처럼 어린 시절 부정적인 가정사로 인해 나도 모르게 '어른 공포증'이 생겨버린 사회 초년생들에게 이 글을 바치고 싶다. 그들이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딛는 게 얼마 힘들지, 또한 남들보다 얼마나 더 큰 용기가 필요할지를 가늠해본다. 마치 가시밭길처럼 어른들이 곳곳에서 본인을 찌르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내가 미리 겪어보니, 사회에 좋은 어른들이 정말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가시가 아니라 넝쿨처럼 본인들의 상처를 감싸주 듯이 말이다. 그러니 사회생활에서 어른들을 대할 때 너무 겁먹거나 부담스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하나 더, 본인이 부정적인 가정사를 겪었던 그 근본 원인과의 해소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본다. 나와 아버지의 관계가 변했듯이 말이다. 정말 쉽진 않겠지만 지금이라도 용감하게 맞서 보자. 그 마음가짐만으로도 '어른 공포증'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