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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feat. 육아)

"외침 속의 고요"

by 똥이애비

결혼하기 전 우리 집안은 조용한 편에 속했다. 아들 하나 있는 세 명의 단출한 가족은 식사를 할 때도 별로 말이 없었다. 나도 사실 말을 하는 것보다는 듣는 편을 더 좋아하는데, 그게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 듯하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안은 다른 집안보다 더욱더 조용했다. 그래서 지금의 아내를 만날 때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하는 모습이 좋았다. 데이트를 하면서 나눈 소소한 말들이 나를 웃게 만들었다. 아내는 스스로가 말하는 것을 좋아해서 잘 들어주는 내 모습이 좋다고 얘기했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린 결국 결혼을 결심했고, 양 집안은 하나의 가족이 되었다.


연애 시절에도 가끔 장모님을 뵌 적이 있지만, 결혼을 하고 자주 뵈고 보니 아내의 말 많은 모습이 장모님께도 보였다. 아니, 장모님이 아내보다 한 수 위였다. 살아온 경험과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들이 아내보다 훨씬 많다 보니, 장모님이 마음먹고 말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 아이가 없는 신혼 초에 한 식당에서 아내와 장모님과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아내와 장모님이 누가 질 세라 내 사이에서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내가 과연 끼어들 틈이 있을까 눈여겨봤지만, 결국 난 포기하고 음식만을 씹기 위해 입을 벌리기로 했다. 그래도 말을 하는 것보단 듣는 것을 좋아했기에 어색한 분위기보다는 주변에서 여러 가지 말을 해주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식사 시간 도중에 가끔씩 장모님이 질문을 해주셨다.


"... 그래서, 조서방은 어떻게 생각하나?"


입을 벌리고 대답을 하려는 순간, 아내가 나를 가로막았다.


"뭘 어떻게 생각해. 내가 말하는 게 맞다니까!"


"너한테 안 물어봤어. 조서방 얘기 좀 듣자!"


하지만 내가 얘기할 기회는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라디오를 듣는 것 같아서 재밌기도 했고, 먹는 것에도 더 집중할 수 있었다.


3년의 신혼 생활 후에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우렁찼고, 한동안 아이의 새벽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서 깬 적이 꽤 많았다. 이때부터 징조가 좀 있었던 듯했지만, 나의 조급한 마음은 아이가 빨리 말이 트이기를 기대했었다. TV나 유튜브를 보면 24개월이 막 지난 시점에도 아이들이 말을 잘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 아이도 사실 이때쯤이면 말이 트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아이와 의사소통만 되면, 왜 우는 건지 물어볼 수도 있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 수 있기에 내가 육아를 하며 겪었던 답답함이 사리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 답답함만 해소된다면, 좀 더 수월한 육아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27개월이 되어서 아이가 말이 트이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사용하는 단어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부모로서 재밌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말을 하기 시작하니까 아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표현해줘서 답답한 마음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 요구사항이 끝날 줄 몰랐다. 이때부터 새로운 육아 난이도가 한 단계 올라선 느낌이었다.


지금은 29개월이 되었다. 이제 아이의 모든 언어적 표현이 상당히 정확해졌고, 확실히 부모와의 의사소통이 한결 수월해졌다. 문장으로 길게 말하고, 누군가의 말을 따라 하거나 중간에 말을 끼어들기도 했다. 이젠 어린이집 선생님 말투를 아이를 통해 알게 되는 경지까지 왔다. 그러다 보니 아이의 말이 쉼이 없었다. 본인도 본인이 말하고 있는 게 신기한 건지 말을 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일 저녁에 나는 퇴근을 하고 집에 일찍 도착했다. 아이의 하원을 맡아주시고 저녁까지도 챙겨주시는 장모님과 집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할 때였다. 그날엔 아내도 일찍 퇴근해 집에 와서 장모님이 차려주신 저녁을 먹으려고 막 자리한 참에 아내가 집에 들어왔다. 장모님과 아내와 아이가 나를 둘러싸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식사를 하는 건 나뿐이고, 셋은 밥을 앞에 두고 각자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장모님은 손녀딸과 하원하고 놀이터에서 있었던 얘기를, 아내는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놀았던 얘기들을 서로 묻고 답하며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도중에 아이가 소리를 쳤다.


"엄마, 말하지 마!"


이제 말을 시작한 아이가 엄마에게 말발로 밀리는 듯한 느낌이 드니까 엄마의 말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아빠를 보면서 자기 얘기를 이어서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이랑 그림 그리고,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놀았어!"


그 모습을 우리 가족들은 모두 흐뭇하게 쳐다보았지만, 아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모님과 아내도 질 세라 말을 이어갔다. 나는 장모님이 차려주신 제육볶음이 맛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귀에서는 피가 나는 듯했다. 그래도 이렇게 시끌벅적한 저녁 식사가 예전의 조용했던 가족 식사보다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에서 좀 피가 나면 어떠한가? 서로 얘기하려는 화목한 분위기에 어울려 나는 나름대로 그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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