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아직 쓰지 않은 연차들이 꽤 많이 쌓여있었다. 어차피 돈으로 받지도 못하니 그냥 금요일에 아무런 개인적인 일 없이 연차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렇다는 건 아이를 돌봐주시던 장모님께서는 휴가라는 의미이다.금요일에 연차라고 얘기하자마자 저녁을 차리시던 장모님 입가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장모님도 육아스트레스가 상당한 듯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금토일 3일 연휴를 보내고 오시면 어느 정도 재충전은 되시리라 믿었다. 연차를 앞두고 아내에게 다음날 언제쯤 퇴근하느냐고 물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아내가 일찍 오라는 압박을 받은 듯했다. 하지만 연차를 앞두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연차 당일 아침 나는 자연스레 출근 시간에 눈이 떠졌다. 알람을 일부러 꺼놓고 잤음에도 몸이 출근을 기억하고 있었다. 눈을 억지로 감으니 잠시 잠이 들었지만,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또 눈이 떠졌다. 결국 7시에 일어나서 핸드폰으로 새로운 소식들을 살폈다. 그러다 시간이 좀 남으면 글을 끄적거렸다. 7시 반쯤 되자 아내의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꺼지더니 5분 후에 또 울렸다. 그것을 3번 정도 반복하니, 아내가 방문을 열고 내가 있는 거실로 나왔다. 출근하기 정말 싫은 표정으로 날 보더니, 연차인데 왜 벌써 일어나 있는 건지 의아해했다. 한두 번 그런 것도 아닌데, 그럴 때마다 난 좀 머쓱해했다. 아내가 급히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세 살 아이는 그 시간까지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린이집 등원 시간은 9시이다.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초조해졌지만, 자고 있는 아이를 억지로 깨우지는 않았다. 아이가 일어나서 먹을 아침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오트밀과 바나나, 삶은 계란으로 먹일 예정이었다. 어제 늦잠을 자서 그런지 9시가 넘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내 시간을 보낼까 하다가 어린이집에 너무 늦을 것 같아서 슬슬 옆으로 가 깨우기 시작했다.
"일어나서 아침 먹자!"
아이는 내 목소리를 듣고 뒤척이며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인상을 쓰며 눈을 꿈벅거리는 모습이 내 눈엔 너무 귀엽기만 했다. 가볍게 볼에 뽀뽀를 하고, 아이가 잘 일어날 수 있도록 부축해 주었다. 아이는 금세 눈이 말똥 해지더니,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빠, 오늘 뭐 하고 놀아요?"
나는 아이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얘기했다.
"오늘은 주말이 아니라서, 어린이집에 가야 해. 어린이집에서 선생님이랑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밥 먹고 아빠랑 같이 어린이집에 가자!"
안 간다고 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아이는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듯했다. 준비한 아침을 먹이고, 나도 대충 아이의 메뉴와 비슷하게 해서 간단히 때웠다. 아이에게 양치와 세수를 시키고, 전 날 아내가 준비해 준 옷을 입혔다. 그리고 가장 난이도 높은 머리 묶기만이 남았다. 이때는 아이가 집중할 수 있도록 만화를 좀 틀어준다. 그럼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는데, 이때 빠르게 양갈래로 묶는다. 아빠 손이라 거칠었는지 가끔씩 '아!' 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를 때마다 내 손이 주춤거렸다.
이제 모든 등원준비를 마치고, 아이에게 인형을 쥐어주고 마스크를 씌웠다. 나는 대충 트레이닝복과 롱패딩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바로 집 앞 2분 거리에 어린이집이 있지만, 아이는 기어코 유모차를 타겠다고 했다. 어린이집에 도착한 시간이 10시가 좀 넘었지만, 그 시간에 등원하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아빠가 등원하는 친구들이 많지는 않아서 괜히 어색해했다. 선생님을 호출하고 아이와 인사했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이따가 보자!"
어린이집에 등원할 때와는 다르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발걸음은 너무나 경쾌했다. 그러다 이 경쾌한 기분을 깨는 전화가 왔다. 눈치 없는 회사 선임이 물어볼 것이 있다고 연락한 것이다. 그래놓고는 연차인지 몰랐다고 미안해했다. 직장인의 숙명이라고 받아들이고, 나는 오랜만에 몸을 풀러 헬스장으로 향했다. 평일 11시쯤 간 아파트 단지 내 헬스장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더욱 여유롭게 운동할 수 있었다. 누가 보면 마치 백수 같겠지만, 그런들 어떠하랴. 지금 여유롭게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좋았다.
1시간 반정도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등원준비로 어질러져있는 집안을 정리했다.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와 접어서 옷장에 차곡차곡 넣었고, 아침 먹은 것을 치우고, 장난감들을 제자리에 놔뒀다. 점심은 그냥 간단하게 닭가슴살과 라면으로 때우기로 했다. 먹는 동안 유튜브로 요즘 즐겨보는 슈카월드 채널을 틀었다. 경제와 사회 얘기를 이렇게나 재미있고 귀에 쏙쏙 박히게 얘기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또 감탄하면서 보았다. 점심을 다 먹고 시계를 보니 2시가 가까워졌다. 이제 하원시간까지 두 시간 남은 것이다. 슬슬 압박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남은 두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다가 문득 이따가 하원하고 4시부터는 또 놀아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체력을 좀 보충하기 위해 살짝 낮잠을 자기로 했다. 감았던 눈을 뜨니 3시가 좀 넘은 시간이 되어있었다. 하원하면 배고프다고 할 테니, 몇 가지 간식거리를 챙겼다. 쌓인 눈을 가지고 놀 수도 있기 때문에 눈오리집게와 장갑도 챙겼다.
어린이집에 도착해서 선생님을 다시 호출했다. 여전히 주변엔 엄마들이 대다수라 뻘쭘하게 기웃거렸다. 아이가 반가운 얼굴로 아빠를 외치며 뛰어왔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선생님께 인사하고, 아이는 자연스레 어린이집 앞 놀이터로 향했다. 챙겨놓은 장갑을 끼워주고 눈오리를 만들어주었다. 이미 놀이터에는 누가 만들어 놓은 눈사람도 있었고, 눈오리도 여러 개 있었기에 아이는 그것들을 구경하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아이를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어서 아내에게 공유해 줬다. 아마 이때쯤 받는 아이 사진들은 아내에겐 힐링이었을 테다. 주위를 둘러보니 5살 이상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눈썰매를 끌고 다녔다. 이제는 눈썰매도 개인 별로 구비해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다음 겨울엔 나도 준비해 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 시간가량 놀이터에서 놀고, 집에 들어와서 저녁을 준비했다. 아이에겐 간단한 간식을 주고 앉아서 보라고 만화를 틀어줬다. 특별히 저녁을 준비할 건 없었다. 전 날 장모님께서 미역국과 조기 남은 것을 냉장고에 넣어놨기 때문에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되었다. 나머지 콩나물이나 시금치 무침도 장모님이 만든 밑반찬들이다. 이것들을 그냥 아이 식판에다 조금씩 덜어냈다. 완성되고 나니 생각보다 훌륭한 건강식이었다. 사실 연차를 내고 가장 걱정되는 게 아이 식사를 챙기는 것인데, 이 부분이 해결되니 부담이 확 줄었다. 장모님이 이렇게 준비해주지 않을 때는 반찬 가게에서 아이 먹을 것을 사기도 하고, 전자레인지만 돌리면 되는 반제품들, 특히 비비고 고등어구이 같은 것들을 마트에서 사서 먹인다. 가끔씩은 한정식 집이나 우동집에 가서 외식을 할 때도 있다. 요리에 서툴러서 아이를 돌보며 요리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게다가 요리에 별로 흥미도 없기도 하다. 어쨌든 저녁을 챙겨 먹이고, 아내가 퇴근해서 집에 올 때까지 여러 가지 놀이들을 한다.
저녁 7시쯤 현관문이 열렸다. 아내였다. 너무나 반가웠다. 아내 손에 들린 닭강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녁을 아이와 함께 먹으니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아이를 아내에게 맡기고 허겁지겁 닭강정 포장을 뜯었다. 옛날 통닭도 한 마리 있었다. 우리 세 식구는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닭을 뜯었다. 옛날 어렸을 때 추억도 새록새록 올라왔다. 그때 신나게 닭다리를 뜯던 아이가 어느새 자기 자식에게 닭을 뜯어주고 있었다. 닭을 뜯는 아이 모습에 배가 불러왔다. 아이는 못 먹는 매콤한 닭강정을 혼자 먹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내가 아이와 있었던 일들, 아내가 회사에서 겪었던 일들을 식탁에 풀어냈다. 그리고 아이도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서툰 말솜씨로 풀어내고 있었다.
저녁 8시가 넘어서 아이에게 선택을 맡겼다. 목욕을 아빠와 할 것인지, 엄마와 할 것인지 말이다. 아이가 대부분은 아빠를 선택했는데, 오늘은 연차를 내고 실컷 놀아줬으니 아내와 목욕하며 노는 것을 원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이건 그냥 아빠 생각일 뿐이었다. 아이는 당연한 듯 '아빠랑 씻을래'하고는 욕실로 가버렸다. 아내는 황당해하는 내 표정을 보며 킥킥거렸다. 아이와 함께 목욕놀이까지 끝내자 피곤이 몰려왔다. 회사를 갔다 와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생각보다 아이와 놀아주는 게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한다. 아내는 내가 아이와 목욕놀이를 하는 동안 씻고 설거지하고, 다음날 아이 등원준비를 했다. 그리고 자기 전까지 아이와 놀아주었다. 그 시간이 9시쯤 되었고 이때부터 난 자유였지만, 한 시간도 채 안되어서 깊게 잠들어버렸다. 아빠가 회사에 연차 낸 날은 이렇듯 연차 같지 않게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