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이의 세 살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두 살일 때는 사실 아무것도 모르니까 별 다른 이벤트 없이 그냥 흘려보냈다. 그땐 크리스마스 즈음에 롯데월드에 놀러 간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분장한 산타할아버지와 사진을 찍으려 했을 때 울고 불고 했었다. 산타할아버지의 덥수룩한 흰 털과 산만한 풍채가 겁이 났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 살부턴 아이가 말도 하고 표현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부모 입장에서 크리스마스 준비를 좀 할 필요가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아이가 먼저 산타할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산타할아버지 언제 와?"
이 때다 싶어서 나는 내 요구사항을 담은 답을 했다.
"산타할아버지는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착한 일 많이 한 아이들한테만 찾아오는데?"
아이 표정을 보니 아빠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직 제대로 파악은 못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너무 성급했나'라고 속으로 생각이 들어 다시 답했다.
"곧 선물 주러 오실 거야, 좀 만 기다려보자!"
아내는 크리스마스 선물 리스트를 나에게 보내고 이 중에 하나 골라서 아이 선물을 준비하자고 말했다. 리스트에는 움직이는 강아지 인형, 블록 놀이 장난감, 찰흙 놀이 세트 등이 있었다. 나는 아이가 아직 집중하는 놀이에는 그런 고퀄리티의 장비(?)는 필요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직관적으로 즐길 수 있는 움직이는 강아지 인형이 좋을 것 같다고 아내에게 말했다.아내도 어느 정도 수긍했는지 강아지로 주문하겠다고 답했다. 얼마 후 택배가 도착했고 아이가 보기 전에 선물을 몰래 숨겨놓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회사에서 받은 배스킨라빈스 쿠폰으로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샀다. 물론 아이가 먹고 싶은 것을 직접 골랐다. 요즘엔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특정 만화 캐릭터를 형상화하여 아기자기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먹기 아까울 만큼 보기 좋은 작품이었다. 저녁밥을 먹고 아이가 기다리던 아이스크림 케이크에 촛불을 붙였다. 갑자기 아이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예전에 생일 때마다 케이크에 촛불 붙이고 노래를 불렀던 게 기억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종교는 없지만 사실 성탄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므로 아이의 생일 축하 노래가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따라 불렀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의 생일 축하 합니다!"
내가 이렇게 부르자, 아이는 그게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아냐, 아냐, 똥이 생일이야!"
그럼 그렇지 싶었다. 케이크에 촛불 붙이고 있으니 본인 생일인 줄 알고 있던 것이다. 아이가 요구하는 대로 이름을 바꿔서 다시 불렀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똥이의 생일 축하 합니다!"
아이는 노래가 끝나자마자 '후~' 하고 촛불을 모조리 꺼버렸다. 그러곤 자축의 박수를 치며, 한 번 더 하자고 소리쳤다.
"아빠, 촛불 한 번 더!"
그렇게 촛불을 네 번 붙이고, 네 번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네 번 불을 끄고, 네 번 박수를 쳤다. 아이에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이 녹아가니 빨리 먹어야 한다고 설득하고 나서야 겨우 그 행위를 멈췄다. 드디어 케이크를 맛있게 먹으며 크리스마스이브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아이가 잠을 자고 나서 아내는 강아지 선물을 가져와 포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신기한 어플이 있다며, 사진에 산타할아버지를 합성해주는 기능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아이의 선물을 놓고 가는 산타할아버지의 사진을 연출해 낼 수 있었다. 이것으로 아이의 크리스마스 동심은 지켜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 아이는 일찍 눈을 떴다. 아무래도 미리 말해놓은 게 아이의 기대감을 키웠나 보다. 일어나자마자 아이가 말했다.
"메리크리스마스! 산타할아버지 왔어요?"
아이에게 메리크리스마스라는 말을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어린이집에서 배워온 듯했다. 나는 선물을 가리키며 아이에게 말했다.
"똥이야,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놓고 가셨어. 여기 사진 봐봐!"
아이는 약간 놀란 눈치였다. 그러고는 내게 물었다.
"산타할아버지 어디 갔어?"
아이가 어느 정도 내 말에 넘어간 듯해서 나는 말을 꾸미기 시작했다.
"산타할아버지는 다른 친구들 선물 주러 가셨지."
아이는 수긍한 듯 포장한 선물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잘 안되는지 아빠에게 도와달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고 드러난 움직이는 강아지를 보고 아이는 신나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렇게 아내와 준비한 크리스마스 동심 지키기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어릴 때 나를 생각해 보니,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2학년 정도 때 이미 산타할아버지가 없는 것을 알았음에도, 일부러 산타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내가 원하는 선물을 정확하게 표현했었다. 아빠, 엄마에게 사달라는 간접적 요구였다. 나는 언제 산타할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아마도 초등학교 1학년 때쯤 친구들과 사촌 형들이 진실을 말해줬을 때였을 것이다. 내 아이도 마찬가지로 몇 년 후에 진실을 알게 될 테다. 아니면 이 글을 읽고선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빠가 아이의 동심을 깰 수는 없으니까 이 글은 최대한 아이에게 숨길 필요가 있겠다. 나는 아이가 크리스마스 동심을 오래 간직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만 아니라 일찍 철들지도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