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아내와 연애할 때의 이야기다. 직장인인 우리는 금요일 저녁에 만나 주말 내내 붙어 다녔다. 1년 간의 연애 후에 결혼한 지 벌써 8년 차가 되었지만, 연애 시절에는 서로 불같이 사랑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우리는 금요일 저녁 천호동 횟집에서 술을 한잔 기울이며, 서로의 사회생활 고단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는 참이슬 후레쉬였고, 아내는 그 시절에 유행하던 '자몽의 이슬'을 잔에 담았다. 그리고는 잔을 부딪치며 우리의 사랑스러운 눈빛도 함께 부딪쳤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회포를 풀고 있던 중에 각자의 대학 생활 얘기가 나왔다. 아내가 말했다.
"나는 과생활을 거의 안 했어. 입학하자마자 공무원을 준비하기로 결심했거든..."
나도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나도 과생활 안 했어. 군대 가기 전엔 동아리 활동하고, 제대하고는 학점 복구하느라 정신없었거든..."
그러다가 아내는 나에게 잔을 따라주며, 시험하듯 물었다.
"나는 학교 수업을 잘 안 들어서 과에서 기초적인 것 밖에 못 배웠어. 삼권분립이 뭔지 알지? 그런 것들 말이야."
삼권분립이라는 용어를 중학교 수업시간에 잠깐 들은 듯해서 익숙했지만, 정확한 의미는 알지 못했다.그래도 대답은 하고 싶었다.
"아, 삼권분립 들어봤는데... 사법... 뭐 그런 거 아냐?"
아내는 충격을 받은 듯 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뭐, 비슷한데... 진짜 몰라?"
나는 알고는 있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듯이 변명하며 답했다.
"아, 그거 중학교 때 배웠는데, 안 써먹으니까 까먹었다."
아내는 어떻게 까먹을 수 있는 건지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입법, 사법, 행정으로 국가 권력을 나눈 거잖아. 상식인데..."
아내의 실망한 표정을 눈치챈 나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맞다! 까먹고 있었네. 그러면 페트병이 왜 페트(PET)인지 알아? 이것도 어찌 보면 상식이거든."
나도 당할 수 없다는 듯 대학 시절에 배웠던 재료공학의 기초적인 내용을 억지로 꺼내 물었다. 그러나 아내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 건 몰라도 사는 데 지장 없잖아... 하지만 삼권분립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상식인데..."
그 얘기를 들으니, 내가 배운 교육이 통째로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 같았고, 기초 상식도 모르는 취급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격양된 목소리로 답했다.
"삼권분립을 몰라도 사는 데 지장 없고, 난 내가 배운 걸로 지금껏 잘 살아왔는데!"
아내는 그때서야 본인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아, 무시하는 게 아니고... 사실은 좀 충격이라서 놀란 것뿐이야. 이제라도 알면 됐지 뭐...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나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아무 말 없이 소주잔을 한 번에 입 속으로 털어 넣었다. 아내는 내 눈치를 보며 살짝 입술에 잔을 갖다 대었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서 그런가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이뻐 보여 마음이 좀 풀리는 듯했다. 그때 깨달았다. 이런 사소한 갈등은 사랑의 힘으로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 수 있구나라는 것을 말이다.
이 사건이 있은 이후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약간의 태도 변화가 있었다. 말 많은 법대 여자였던 아내는 본인이 생각하던 상식 선에 대한 것이 각자가 배워오고 관심 있는 영역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듯해서 더 이상 이런 상식 테스트 같은 질문들은 하지 않았다. 그냥 본인이 아는 것을 자연스레 풀어놓는 것에 집중했다. 나도 이러한 태도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복잡한 세상을 효율적으로 살아가려면 인간은 분업을 해야 하고, 분업화된 인간들이 그 과정에서 알아가는 삶은 각자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초 상식은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 할 말은 없을 테지만, 그 기초 상식의 선은 누가 판단하고 규정하는지 의문으로 남는다.
말 없는 공대 남자였던 나는 서점에서 기초 상식에 관련된 책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때 당시 유행하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책을 구입했다. 하지만 그 시절 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나는 억지로 삼분의 일 정도를 읽고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아무래도 나 스스로 필요를 느끼고 그 분야에 관심이 있어야만, 알게 되고 까먹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 관심이 있는 만큼 상식도 쌓이게 되는 것을 알게 되어, 난 좀 더 세상에 관심을 갖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