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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이애비 Feb 05. 2023

아내와 처음 만난 날

"사랑의 작대기가 이어준 커플"

  취업을 하고 없던 돈이 내 주머니 속에 채워지면서 난 한동안 음주가무를 즐겼다. 탕진하는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 난 주로 강남을 무대로 삼았다. 오래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난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들과 한참을 놀러 다녔다. 신기하게도 초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과 연락이 끊기고 나서 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만났음에도 여전히 쉽게 다시 친해질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 친하게 놀던 추억을 공유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기본적인 성향이 비슷해서 인지는 모르겠다. 각자가 살아가는 방식은 꽤 달라져 있었지만, 놀 때만큼은 우린 하나였다.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여자를 만나고, 또 술을 마시는 일련의 과정들이 나에겐 답답한 회사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탈이었다.


  친구들과 정신없이 몇 달간 놀다 보니 조금씩 지금 놀고 있는 방식이 지겨워졌다. 뭔가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주말 점심 무렵 친구 자취방에서 뒹구르고 있던 나는 나머지 친구 두 명에게 말했다.


"우리 이렇게 노는 것도 점점 지겨운데... 뭔가 새롭게 놀 수 있는 게 없을까?"


듣고 있던 한 친구가 내 말에 동조하며 답했다.


"맞아, 돈만 쓰고 실속은 없는 것 같아. 너네 지금 연락하는 여자 애들이랑도 진지하게 사귀는 건 아니잖아..."


다른 친구도 이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휴, 우리 그럼 미팅 같은 거 알아볼까? 너네 친한 여자 애들 없냐?"


서로의 표정을 살피던 우리는 동시에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나는 체념하듯 친구들에게 말했다.


"에휴, 됐다. 그냥 이따 저녁에 강남이나 가자!"



  얼마 후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친구 한 녀석에게 카톡이 왔다. 자기가 유일하게 아는 대학 여자 동기에게 겨우 말해서 3 : 3으로 미팅을 잡았으니까 시간을 비우라는 것이다. 게다가 2명이 공무원이고, 1명은 영양사라고 말했다. 나는 '물론!'이라고 답했다. 곧이어 다른 녀석도 '당연하지!'라고 답했다. 아직 시간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우린 무조건 그쪽 일정에 맞출 생각이었다. 카톡으로 친구가 미팅에 나올 여자들의 사진을 보내줬다. 파티룸에서 콘셉트를 잡고 놀았던 사진이었는데, 세 명 다 외모가 괜찮았지만 사진빨에 한두 번 속은 게 아니라서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미팅을 하게 되어서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강남에서 놀면서 만난 여자들보다는 좀 더 진지하게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11월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 겨울이 어느새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하지만 난 한껏 멋을 부리기 위해 코트를 차려입었고, 내가 보유하고 있는 신발 중 가장 굽이 높은 로퍼를 신었다. 약속 장소는 천호동이었고, 저녁 6시까지 가기로 되어 있었다. 과거에 로데오거리 현대백화점에서 주차 안내 알바를 좀 해봐서 천호동은 나름 익숙한 동네였다. 친구들과 미리 만나 작전을 세우려던 찰나 여자들에게 연락이 왔다. 추워서 미리 2층 룸술집에 들어가 있겠다는 것이다. '오호라, 화끈하게 바로 술로 시작하자는 의미구나!'라며,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회심의 웃음을 지었다. 전화를 받고 있던 친구가 곧 그리고 가겠다고 말했다.



  직원에게 안내를 받은 뒤 두근대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세 명이 나란히 옹기종기 앉아있었고,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문이 열려서 좀 당황한 듯했다. 그럼에도 그녀들의 눈은 우리를 스캔하느라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미리 사진으로 본 외모는 실제로 봐도 비슷했는데, 그중 유독 하얀색 셔츠를 입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는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머지 두 여자들 보단 확실히 키가 큰 듯했는데, 다른 여자들처럼 등을 벽에 기대 있지 않으니까 머리가 하나 더 솟아 있는 느낌이었다. 첫인상은 제일 이쁜 것 같긴 했는데, 매우 까다로워 보였다. 자리에 앉은 뒤에 대학 동기였던 주선자들이 서로 안부를 묻고, 그들의 대학 얘기들로 어색한 분위기를 잠시 풀어내었다. 그러면서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행동과 표정과 외모를 뜯어보고 있었다. 대학교 때와는 사뭇 다른 직장인들의 미팅자리는 뭔가 더 팽팽한 신경전이 오가는 듯했다.


  저녁 식사거리로 배를 채운 뒤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며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처음 만난 자리에서 술을 마실 때는 술게임이 빠질 순 없었다. 술기운이 어느 정도 오르자 게임이 필요 없어졌다. 이젠 각자의 얘기들을 가감 없이 풀어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임하며 놀다 보니 짝이 지어졌는데, 처음부터 눈길이 가던 그녀는 다른 친구와 짝이 되어 있었다. 그 친구도 역시나 그녀에게 호감을 표현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 친구를 밀어줘야겠다는 생각에 시무룩해했지만, 다음에도 이런 기회는 많을 거니까 오늘은 그냥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날씨도 춥고 아늑하니, 우린 굳이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길 필요 없이 룸 술집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먹고 마셨다. 11시가 넘어가는 시간이 되자 각자가 이젠 가봐야 할 때가 되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점차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주선자 친구가 이를 눈치채고는 말했다.


"우리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사랑의 작대기 하고 갈까?"

 

사랑의 작대기는 결국 지금까지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게임이었고, 모두가 수긍한 끝에 이 게임이 진행되었다. 지목할 순서는 간단하게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사람부터 순서대로 한 명씩 지목하기로 했는데, 내가 첫 번째로 지목해야 했다. 나는 속으로 한참을 고민했다. 나랑 지금껏 짝지어 놀던 여자를 지목해야 하나, 아님 처음부터 내 눈에 들어왔던 여자를 지목할까 하다가 결국 난 후회하지 않도록 마음이 가는 대로 후자를 선택했다. 그녀와 짝이던 친구 녀석은 살짝 당황했지만, 그녀의 선택을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친구는 순번이 마지막이니까 모든 패를 다 보고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내가 지목한 그녀가 나를 지목한 것이다. 친구는 혼란스러웠을 테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나는 적잖이 놀란 상태였고, 그녀와 친구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친구는 결국 다른 여자를 지목했고 이 게임에서 서로 지목된 사람은 나와 그녀가 유일했다.


  술자리를 파하고 우리는 추운 밤길을 걸었다. 자연스레 나와 그녀는 무리 중 뒤쪽에서 나란히 길을 걷고 있었다. 다행히 친구 녀석이 술집을 나올 때 귓속말로 '잘해봐!'라고 응원해 줘서 미안한 마음이 좀 가셨다. 이젠 적극적으로 표현할 때라는 것을 알고 나는 그녀에게 처음부터 마음에 있어서 지목했다고 말했고, 핸드폰 번호도 달라고 말했다. 그녀도 별 말없이 번호를 주었다. 우린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각자 흩어졌는데, 나는 그녀의 집 앞까지 바래다 주기로 했다. 천호동 골목 어귀에서 그녀는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보겠다고 말했고, 난 다음에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난 뒤돌아서서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다. 술을 꽤 많이 마신 상태였지만, 또렷이 설레는 이 기분은 내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껏 표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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