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계약을 하다

"본캐와 부캐 사이"

by 똥이애비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다. 예정되어 있던 출판사와의 미팅으로 회사에는 연차를 냈다. 친한 회사 동료는 연초부터 벌써 연차를 쓰냐며 뭐 하려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아직 공개하기가 부끄러워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이럴 땐 아이를 핑계 삼으면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냥 오랜만에 아이와 실컷 놀아주려고..."


동료는 별 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나의 거짓 변명을 받아들였다. 이런 변명을 한다는 게 아이에게 살짝 미안함 감이 들었지만, 오전에 출판사 미팅을 마치면 오후부터는 진짜로 실컷 놀아줄 요량이었다.


당일 아침 회사를 출근하는 시간보다는 늦게 일어났지만, 그래도 남들 출근하는 시간만큼은 일찍 일어났다. 예정된 미팅 시간이 10시이고 비가 내리고 있으므로, 차가 막힐 것을 생각하여 8시에는 출발해야 했다. 전날 장모님께 말하여 아이 어린이집 등원만 도와달라고 말했다. 아내는 일찍이 출근을 하여 집에 없었고, 나는 분주히 준비하였다. 바쁜 와중에 아침은 간단히라도 챙겨 먹는 스타일이라, 닭가슴살과 바나나를 먹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이가 일어나서 내 옆에 앉았다.


"아, 잘 잤다. 아빠, 오늘 뭐 하고 놀아요?"


평일엔 일어나면 아빠가 회사 가고 없었는데, 일어나 보니 아빠가 있어서 주말인 줄 알고 있는 듯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장모님께서 들어오셨다.


"아, 비가 무지하게 많이 오네."


나는 그 말을 듣고 살짝 장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오셨어요? 똥이가 벌써 깼어요."


아이는 할머니가 주말에 왜 오는지 의아한 표정이었다. 할머니는 아이를 보고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똥이야, 오늘 할머니랑 어린이집 가자. 아빠랑은 이따가 오후에 같이 놀자."


그 말을 듣고 아이는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예상했던 일과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싫어, 할머니 집에 가! 나 아빠랑 있을 거야!"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아이는 진정을 하고는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장모님은 인감도장을 챙기고 있는 나를 힐끗 보며 무슨 일로 어디 가는지를 물었지만, 나는 그냥 일이 있다며 에둘러댔다. 아마도 아내가 대략적으로는 장모님께 말을 했을 테니, 뭐 하러 가는지 대충은 아실 거라 짐작했다. 나는 아이와 인사하고, 오후에 꼭 재밌게 놀아주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집을 나섰다.


역시나 비가 오고 출근 시간이 겹치니 차가 많이 막혔다. 평소 같으면 1시간 좀 넘게 걸리는 거리인데, 2시간 가까이 소요되었다. 편집자님께서 사장님도 오신다고 하셔서 늦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래도 비 오는 차 속에서 옛 음악을 들으니 기분은 좋았다. 그리고 차 타고 가고 있는 이 길이 새로운 도전의 길이라서 더욱 그랬다. 무사히 약속시간 딱 10분을 남기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출판사 문 앞까지 간 뒤 편집자님께 전화를 걸었다.


"편집자님, 도착해서 문 앞에 있습니다."


편집자님은 바로 문을 열고 나오셨고, 인사를 나눈 뒤 나를 회의실로 안내해 주셨다. 회의실에서 편집자님 명함을 주셨고, 나는 회사 명함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회사 명함이라도 주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그냥 받기만 하면 되는 건지 잠시 생각했었다. 편집자님은 낯설어하는 나를 위해 차를 한 잔 준비해 주시고, 여러 서류를 내 앞에 펼쳐주셨다. 나는 갈 곳 없이 방황하는 눈을 서류에 놓아둘 수 있었다. 서류는 총 세 가지였는데, 출판 계약서 1부, 출간 계획서 1부, 내가 보낸 한 꼭지 분량의 원고 1부가 출력되어 있었다. 편집자님은 조금 있으면 사장님께서 오 실 테니 편하게 보고 있으라고 말해주었다.


얼마 후 사장님께서 오셔서 명함을 주시기에 엉겁결에 받았지만, 이번엔 내 회사 명함을 내밀진 못했다. 편집자님께 드릴 때 했던 고민의 결과물이었다. 회사의 직원으로 이 회의의 참석한 게 아니라, 작가 지망생으로 참석한 것이므로 작가 명함이 없다면 굳이 내 회사 명함을 내밀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장님께서는 늘 있는 일이라 여기고는 명함만 주시고 바로 자리에 앉으셨다. 그러고는 비 오는데 차 막히지 않았는지, 어디서 오신 건지 가볍게 물으셨다. 나도 가볍게 대답하며, 회의 분위기에 점차 익숙해졌다. 본격적으로 이 회의의 목적을 밝히기 위해 편집자님께서 서류를 하나씩 보시고는 설명을 하셨다. 나는 어떤 목적과 어떤 콘셉트로 주요 타깃 독자층을 설정한 건지 미리 알고 있었고, 예상 목차까지도 편집자님과 얘기를 나눈 상태였다. 아마도 사장님도 미리 보고를 받고 오신 듯했다. 사장님은 계획서보다는 내가 쓴 원고를 살피셨다. 편집자님이 이를 눈치채고 간략히 계획서 설명을 마치고는 원고에 대해 얘기하였다.


"예상 원고가 한 꼭지 분량인데, A4로 2페이지밖에 안 나와서 내용을 좀 추가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나도 이에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 브런치에 발행된 글을 그대로 가져왔는데, 원고 작성하면서 내용은 더 추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장님은 보고 있던 원고를 덮으시며 말했다.


"요즘 책이 두꺼운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한 꼭지당 A4로 2~3페이지 정도 나오면 충분할 것 같아요. 그리고 마지막에 Tip을 요약해서 넣으면 구성은 괜찮을 것 같네요."


나는 나보다 전문가의 말에는 토를 달지 않는 성격이라 그러겠다고 답했다. 어느 정도 책의 구성과 원고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서는 본격적으로 출판 계약서로 넘어갔다. 사장님께서는 5페이지 분량의 계약서를 조항 하나씩 상세히 읽으시며, 나를 이해시켰다. 아마도 회의 초반에 내가 책을 내려는 게 처음이라고 밝혀서 그런 듯 싶었다. 든 내용의 상세한 설명을 들었지만, 가장 귀에 들어오는 건 역시나 인세, 출판 부수, 계약금, 1차 원고 제출일이었다. 구체적인 금액이 명시되어 있으니, 뭔가 부담감이 앞서기 시작했다. 돈을 받고 뭔가를 하면 프로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1차 원고 제출일은 아직 4달 이상 여유가 있었고, 이미 브런치에 발행된 글들로 예상 목차를 대부분 꾸려 놓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왕에 확실히 구성하고 내용을 덧대어 부끄럽지 않은 책을 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사장님께서는 설명을 마치시고는 계약서를 돌아가서 다시 보셔도 되고, 오늘 도장을 찍어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별 다른 특이점을 찾지 못하여 오늘 온 김에 도장까지 찍기로 마음먹었다. 계약서 상에 책의 가제, 인적사항, 이름을 쓰고 준비해 놓은 인감도장을 이름 옆에 찍었다. 이렇게 출판 계약이 마무리되었고, 나는 이제 진짜 프로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사장님께서는 궁금한 게 더 있으면 편집자님과 더 얘기를 나누시라고 말씀하시고는 회의실을 나가셨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나는 편집자님께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그 와중에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질문도 있었다.


"책의 지은이를 꼭 실명으로 해야 하나요? 아니면 필명을 써도 되나요?"


편집자님께서는 일단 실명으로 기획을 했는데, 필명도 가능하다고 답했다. 나는 이런 질문이 엉뚱하다고 여길 것 같아 장황하게 변명을 했다.


"책이 직장 생활 얘기인데, 제가 아직 직장인이라 실명으로 하기엔 부담스럽기도 하고, 솔직한 글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편집자님은 늘 있는 일인 듯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필명을 쓰시는 작가님도 꽤 계십니다. 바로 답하지 않으셔도 되니까 돌아가셔서 한 번 고민해 보세요."


나는 내 실명으로 책이 나가는 게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지, 브런치 작가명인 '똥이애비'라는 필명으로 나의 본캐를 숨기는 게 더 효과적일지를 잠시 고민하다가, 책을 쓰면서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고민을 금방 접어버렸다.


모든 회의를 끝내고 나는 도장 찍은 계약서와, 나머지 서류를 가방에 고이 모시고는 일어섰다. 편집자님께서는 잠깐 기다려 보시라며 사무실 구석으로 가 책을 두권 꺼내셨다. 그리고 내게 주시고는 선물이라며, 이 책들이 내가 글을 쓸 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원고를 쓰면서 자주 연락 드리겠노라고 말했다. 1시간 정도 되는 짧은 미팅이었지만, 순간순간 장면들이 내겐 뚜렷하게 남았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집을 나설 때보다 더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자기표현의 시대에 글쓰기를 택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