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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이애비 Jun 09. 2023

퇴사(탈출)를 축하해!

"침몰하고 있는 배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회사에서의 소문은 상당히 빠르다. 그리고 나름 정확하다. 정말 뜬금없는 소문은 잘 없고,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다가 와전되는 경우는 꽤 있다. 며칠 전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회사 후배가 실험실에 앉아있는 나에게 다가와 나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과장님, 그거 아세요? 인수선배 이직 준비한 거 최종 합격 했대요!"


인수와 각별히 지내던 인수 1년 후배인 재현이는 누가 들을까 봐 주변을 두리번 대며 아무도 없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난 이미 인수가 이직 준비하면서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수가 나와 회사에서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터놓고 얘기해 준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몇몇 동기와 후배들에게도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신기한 것은 이 소수의 사람들 선에서 비밀을 잘 지켜오고 있기에 내 윗 선임들의 귀에까지는 들어가지 않은 것이었다. 당사자의 얘기를 들어보니 왠지 그의 이직 전형이 물 흐르듯 잘 흘러갈 것 같았지만, 실제로 최종 이직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놀라긴 했다.


"와 대박이네! 결국 인수도 가는구나."


  나는 작년 말에 인수와 함께 있던 팀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팀에서 업무 적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수가 이직 준비하는 동안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것에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소문을 들은 오후에 난 인수와 재현이 그리고 이 소식을 알고 있는 몇몇 후배들을 불러 모아 커피를 한잔 하자고 했다. 이제 정말 인수에게 커피를 사줄 날도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난 빠르게 이  소식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나는 시원 씁쓸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뒤 인수를 보며 말했다.


"인수야, 오래 준비하더니 결국 됐나 보네? 축하한다!"


인수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과장님! 저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있을게요."


몇몇 후배들이 뒤이어 얘기하기 시작했다.


"와, 좋겠다. 인수야, 너도 대기업으로 가는구나! 연봉이랑 복지가 지금보다 훨씬 좋지?"


"우리 직무가 너무 특수해서 이직 못하는 줄 알았는데, 인수 보니까 희망이 생기네! 나도 이직 준비 해야겠어."


"나는 서류에서 광탈하던데, 자소서 어떻게 쓴 거야? 공유 좀 해주라!"


"인수야, 너 퇴사 날짜 잡히면 팀장이랑 윗 분들에게 시원하게 욕 좀 해주고 가면 안 되냐?"


인수는 시끌시끌한 선, 후배 그리고 동기들의 질문들에 하나씩 반응해 주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 부러운 눈으로 인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나도 사실 팀을 옮기기 전에는 이직 준비를 꽤나 했었지만, 서류에서 탈락하는 건 부지기수였고, 운 좋게 면접까지 가도 최종에서 떨어지는 쓴 맛도 보았다. 그러면서 이직이 쉽지가 않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인수가 이번에 이직에 성공을 하니까 다시 이직 의지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최근 인수 외에도 이곳저곳에서 직원들이 이직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팀장이 이직했다는 소식도 있었고, 아예 한 파트를 구성하고 있던 직원들 모두가 전부 이직해서 파트가 사라진 팀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입사했던 십여 년 전에는 이 정도로 활발히 그리고 대놓고 이직하는 경우가 잘 없었다. 직원들은 나름 회사의 연봉과 커리어에 만족하고 있었고, 일은 힘들지만 그 속에서 경력과 노하우를 쌓고 있다고 여기는 분위기였다. 대기업은 아니지만 외부의 인지도도 꽤 있는 탄탄한 중견 회사의 이미지였다. 그래서 난 이 회사에서 오래 일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고, 이 회사의 일원이라는 것에 당당한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십 년의 세월 동안 나와 내 동료들이 회사를 인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요즘 내 동기들을 만나면 서로 안쓰럽다는 듯 말한다.


"하마터면 회사가 가장 좋을 때 입사해서 십 년째 내리막길만 보고 있네,,, 휴, 주식뿐만 아니라 회사 생활도 고점에 물렸구먼."


어떻게 회사는 직원들이 갖고 있던 기대와 바람을 긴 세월에 걸쳐 차츰차츰 꺾어버렸을까. 산업 자체가 사양 산업도 아니고 회사의 매출은 최고치를 경신하는데도 말이다. 이런 지경까지 와버린 것에는 다양한 사유들이 있겠지만, 대략 경쟁사 대비 해서 떨어진 임금 경쟁력과 복지 수준, 과도한 업무량, 세월을 거스르는 경직된 회사 분위기, 미래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회장의 눈만 가리고 있는 책임감 없는 경영진 등이 있겠다. 이 모든 것이 쌓여 회사가 탈출해야만 하는 곳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일찍이 회사가 망해간다는 것을 눈치챈 인력들과 핵심인재들은 빠르게 이직할 곳을 알아보고 차례로 퇴사하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이들에게 업무량이 몰려 과도해지고, 품질은 이전만 못하게 되어버리면서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젠 이 회사를 탈출하지 못하는 사람은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인지되었다. 퇴사와 이직으로 회사를 벗어난 사람들을 서로 축하해 주기 시작했고,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들은 동료들의 탈출을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인수의 이직 성공은 마땅히 축하해 줘야 할 것이었고, 남아 있는 이들도 다시금 이 회사를 탈출할 수 있는 의지를 다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인수는 아직 팀장과 파트장에게는 얘기하지 않았다. 아직 이직할 회사의 처우 협의가 남아있고, 최종 입사 날짜가 나오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일주일 또는 이주 안에 인수의 최종 퇴사 날짜가 나오면, 친한 사람들 몇몇이 모여 축하 파티와 송별회를 하게 될 것이다. 그 날짜는 팀장과 파트장에게 인수가 퇴사를 통보한 직후로 잡아서 당당하게 퇴사를 말하는 통쾌함을 대리만족할 예정이다. 이젠 더 이상 한 회사에 미련을 두지 말고, 좋은 기회가 있으면 각자 살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 맞는 듯싶다. 하지만 기회를 못 찾아 회사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내 커리어와 개인 역량을 최대한 쌓을 수 있는 업무를 찾아 더욱 몰입하는 것이 좋겠.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나도 인수처럼 기분 좋게 떠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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