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똥이애비 Jun 10. 2023

십 년간 회사를 다니며 처음으로 느낀 학벌 콤플렉스

"회사 다니는 석사 준비생입니다."

  난 대학교 시절 공부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 대학생이라는 목표를 이뤘고, 게다가 내 실력으로는 과분한 학교에 1차 수시로 쉽게 왔으니 더 이상 이루고 싶은 것도 없었다. 꿈을 잃었다고 해야 하나. 당시 학자금 대출을 통해 학비를 메꾸고 있었음에도 아르바이트나 집안 생계에 별 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지긋지긋한 학창생활을 벗어나 자유로운 성인의 삶이 펼쳐지는 것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못했던, 성인이 되면 하고 싶었던 것을 다 해보기로 했다. 일단 술을 마시고 여자를 만났다. 남중, 남고를 거쳐 공대까지 오게 된 나에게 여자라는 생물은 유니콘에 가까웠다.


  여자를 알고 밤문화를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왜 이렇게 재밌는 것을 몰랐을까, 좀만 일찍 알 걸...' 하는 후회도 있었지만, 후회할 시간조차 아까울 만큼 실컷 놀았다. 당연히 대학교 신입생 때 내 학점을 처참했고, 1학기에 평점 2점이 안 넘어서 '학사 경고'라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받게 되었음에도 그때 당시엔 별 일 아니라는 듯 치부해 버렸다. 그 후 군대를 제대하고 파멸해 버린 학점을 다시 복구하고 살려내느라 개고생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근데 지금의 나에게 다시 대학 신입생 시절로 돌아가면 어떻게 살 거냐고 물어본다고 해도 난 그때와  똑같이 한동안 놀고먹는 삶을 택했을 것 같다. 그때만 할 수 있는 일탈이라고 생각한다.


  군 제대 후에 처음으로 평점 4점을 넘겼다. 남자는 군대 다녀오면 정신 차린 다는 말이 실제로 나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전공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1학년 때의 평점 기준으로 2학년 때 전공을 정해야 했는데, 내가 원했던 과의 평점은 3점이 넘어야 들어갈 수 있었고, 난 그때 당시 학생들에게 별 인기 없는 과에 억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처럼 평점이 바닥을 기고 있는 사람은 인원이 부족한 과의 빈자리를 채울 뿐이었다. 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결국 복학을 하고 취업 시장이 눈앞에 아른거렸기에 전공 학점을 끌어올려 전체 평점을 높여 놔야만 했다. 취업 서류에서 커트당하지 않기 위해 평점 3.5 이상을 확보하기 위해 부단히 공부했다. 꾸역꾸역 하다 보니 전공 공부에 재미도 이따금 느꼈지만, 전공을 살려 대학원을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학문적으로 깊이 파고드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집안 사정 상 바로 취업을 해서 돈벌이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나는 당연히 학사 졸업을 앞두고 자연스레 취업 시장에 문을 두드렸다. 대학 동기들 중 몇몇은 학문에 뜻이 있거나 원하는 곳에 취업이 되지 않아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생이 된 그들을 보고서도 난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그들은 그들만의 길이 또 있을 거라 여겼다.



  다행히도 몇몇 기업에 붙어서 그중 하나의 회사에 입사를 하였다. 이 회사를 고른 이유는 공장이 아닌 연구소에서 일할 수 있었기에 수도권 생활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방에서 일하는 것도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선택의 기로에 놓이니 그래도 수도권에서 일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업무 강도는 높지만 그에 따라 연봉도 두둑이 챙겨준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렇게 민간 회사의 연구소에 몸 담은 지 십여 년이 흘렀다.


  최근 팀을 옮기고 새로운 업무를 배정받으면서 국책과제를 기획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민간회사 연구소에서 신규 기술을 가장 빠르게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은 국책과제를 통해 대학, 연구기관과 협업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필요한 기술의 동향도 파악하기 위해 난 실무자로서 해외와 국내 학회를 다녀왔다. 해외 학회는 혼자서 일본에 3박 4일간 다녀왔고, 국내 학회는 팀장과 함께 1박 2일로 다녀왔다. 혼자 해외 학회에 갈 때는 걱정이 많았지만, 막상 참관을 하고 보니 한국인들이 꽤 많이 있었다. 아무래도 가까운 일본에서 개최하다 보니 많은 국내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 다행히 아는 얼굴들이 있어 반갑게 인사했다. 그분들은 나와 현재 국책과제로 엮여있는 인연들이다. 바로 대학 교수님들과 박시님들 그리고 연구기관의 박사님들이다. 민간 회사에서 연구원이 혼자 처음으로 타지에서 하는 해외 학회에 참석했다는 사실이 안쓰러웠는지 학회 참관 일정과 점심 식사 그리고 저녁 술자리까지 나를 껴주었다. 3박 4일 동안 내가 일본 학회에 기술 동향을 파악하러 온 건지, 일본 술을 실컷 마시러 온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관련 기술에 종사하고 있는 박사님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중 한 대학 교수님이 술을 마시며 내게 물었다.


"회사 연구원이시면 박사까지 하신 건가요?"


"아니요. 저는 학사 졸업 후에 바로 취업했습니다."


교수님은 내 답변을 듣고는 살짝 놀라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다 보니 내가 최소 석사 이상은 졸업한 줄 알았던 듯싶었다. 약간 민망했는지 내게 이런 제안을 해주셨다.


"아, 그럼 우리 학교에서 석박 통합으로 학위 따면 되겠네! 회사 다니면서도 할 수 있으니까 관심 있으시면 한번 지원해 보세요."


나는 빈 말이더라도 너무 감사했다. 사실 회사 다니는 동안에 학위 욕심이 생겨서 회사에서 복지 차원에서 보내주는 석사 학위에 두 번 정도 지원 했지만, 경쟁이 높아 매번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고선 다신 기회가 없을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교수님과 직접 관계를 맺고 학위를 딸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이 조금 엿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술자리에선 흐지부지 마무리되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새로운 희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일주일 후 팀장님과 국내 학회도 참관하게 되었다. 팀장님은 내가 다녔던 대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지난 해외 학회에서 진하게 관계를 맺어온 교수님과 박사님들 대부분 국내 학회에서 다시 만나 뵐 수 있었다. 그중 한 박사님이 학회가 끝나고 저녁 모임이 있을 예정이니 오실 수 있으면 팀장님과 함께 오시라고 말씀해 주셨다. 팀장님도 이런 관계의 중요성을 알고 계셨기에 흔쾌히 가보자고 말씀하셨다. 학회가 끝나고 숙소에 들러 짐을 풀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저녁 6시쯤 모임 장소인 횟집으로 팀장님과 함께 갔다.


  우리가 조금 늦게 도착해서인지 이미 술 판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대략 참석자는 스무 명 정도 되었다. 해외 학회서 보았던 얼굴들도 있었지만, 나머지 절반 정도는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게다가 석사 학생들도 함께 있었다. 팀장과 한쪽에 자리를 한 뒤 소맥 한잔을 걸치며 자연스레 이들 분위기에 편승하였다. 먹고 마시며 즐기는 사이에 여러 얘기들이 오가게 되었고, 대부분 대학을 오래 다녀서 그런지 학교에 대한 얘기와 국가 연구기관에 대한 얘기들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참석한 이들의 석사, 박사학위를 어디서 취득했는지, 어디 연구실 출신인지 엿들을 수 있었으며, 우리가 얻고자 하는 새로운 기술에서 어느 교수님이 권위가 높으신지 가늠이 되기 시작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스무 명이 넘는 참석자 중에 오로지 나만 '학사 출신'이었다. 처음 보는 분들이 민간회사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하니, 종종 어디 연구실 출신인지 물어보는 경우가 있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민망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저는 가방 끈이 짧습니다. 학사 출신이에요."


대부분의 반응은 "아, 그러시구나..."였고, 이들 중 그나마 분위기를 살리고 싶어 했던 반응은 "전공이 뭐였어요? 석사나 박사 생각은 없으세요?"라고 되물었다. 박사인 팀장님도 나에게 좋은 기회가 있으면 최소한 석사라도 갈 수 있게 준비해 보라고 말했다. 회사 다니면서 딸 수 있게 최대한 지원해 주겠다는 것이다. 해외 학회 때와 더불어 국내 학회를 참석하며 대한민국에서 가방끈이 긴 이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니, 학사 출신이라는 것에 스스로 굉장히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연구를 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 학문적 깊이를 요하는 일이다 보니까, 아무리 민간회사 연구소에 있다 하더라도 필요한 기술에 대해 배움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최소한 석사 학위라도 따서 이들과 오래 어울리며, 전공에 대해 탄탄한 이론도 더욱 습득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결국 이 날 이후로 난 회사를 다니는 석사 준비생이 되어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탈출)를 축하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