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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이애비 Aug 05. 2023

성우 학원 첫 수업이 있는 날

늦깎이 성우 도전기(3)

  성우와 관련하여 인터넷 카페에 가입해 보니, 다양한 성우 전문 학원들이 수없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성우의 활동 영역에는 성우지망생들을 가르치는 강사의 역할도 있었던 것이다. 전문 성우가 수업을 열어 다양한 목적의 반을 만들고, 수강생들은 성우의 유명세나 반의 목적을 보고 선택해서 수강할 수 있다. 나는 이왕 시작하는 김에 전문 성우의 도움을 한 번은 꼭 받고 싶어서 일주일 정도 인터넷에 올라오는 수강생 모집 홍보글을 꽤 많이 읽어 보았다. 그중에 KBS에서 진행하는 방송 아카데미에서 성우 단기 특강이 몇 가지 있었는데 오디오 크리에이터, 오디오북, 성우 취미반이 개설되어 있었다. 일단 KBS라는 공신력 있는 공영 방송사에서 운영하는 것이라 신뢰가 갔었고, 다른 학원의 공채 준비, 더빙, 연기, 발성반 같은 전문적인 수업보다는 조금 가볍게 부담 없이 들어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아직은 내 마음속에 성우라는 꿈에 의문이 많이 있는 상태였으므로, 일단은 가벼운 마음으로 성우 취미반에서 수업을 들으며 성우로 가는 길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첫 수업이 열리는 날. 매주 금요일에 8주 간 세 시간씩 수업을 듣기로 되어 있었다. 항상 처음 가는 수업 설레기 마련이다. 회사 업무를 빠르게 정리하고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대중교통을 타고 수업이 열리는 KBS 미디어센터로 갔다. 금요일이기도 하고 퇴근 시간도 겹쳐서 이르게 회사에서 나왔음에도 겨우 겨우 수업이 시작하는 일곱 시에 딱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날짜와 장소에 대한 고려 없이 너무 수업의 목적만 보고 선택했나 싶은 후회도 살짝 들었다. 사실은 조금 일찍 도착하면 식당이나 빵집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갈 요량이었는데, 시간이 그것을 허락해 주지는 않았다. 반에 들어가니 이미 대, 여섯 명 정도의 인원이 앉아 있었다. 나는 내가 이 수업에서 나이가 꽤 많은 축에 속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취미반이라서 그런가 연배가 높으신 분들이 꽤 많았다. 강사님은 작은 체구의 여성 성우 분이셨고, 1999년에 KBS 공채 성우로 시작하여 20년이 넘게 성우로 활동하고 계신 전문가였다. 뒤늦게 다른 수강생들이 들어와서, 총 10명의 인원이 이 수업을 듣게 되는 모양이었다.


  세 시간의 수업 중 첫 시간에는 강사님의 약력과 성우라는 직업의 현실을 상세히 알게 되었다. 강사님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생각보다 평범하다는 느낌이었데, 여러 이야기들을 다양한 연기를 섞어서 재미나게 말씀하시니까 어느새 목소리에 몰입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성우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직접 겪은 에피소드를 곁들여 현실감 있게 얘기해 주셨다. 본업으로 20년 이상 성우 생활을 해오다 보니 생생한 현장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는데, 듣다 보니 성우라는 직업의 장, 단점을 아래와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었다.


장점)

  - 목소리 하나로 굉장히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라디오 DJ, 오디오북, 광고 녹음, 유튜브, 교재 등)

  - 직장인에 비해 일하는 시간이 자유롭다.

  -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단점)

  - 시간이 자유롭지만, 대부분 클라이언트 시간에 맞춘다.

  - 작업 후에 정산을 받는다.

  - 여러 동료들과 함께 하다 보면 기다림의 시간이 길다.


리얼한 성우의 세계를 들으니 뭔가 가슴이 더 두근거렸다. 이 수업을 통해 서른일곱의 나이에 내 목소리로도 공채 성우를 도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을 최대한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강사님은 성우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강사님과 같이 방송사 공채로 뽑혀 2년의 전속기간을 거치고 성우 협회에 등록된 전문(공채) 성우와 오디오 크리에이터와 같이 별도의 협회에 등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매력 있는 목소리로 자기만의 영역을 갖춘 일반(언더) 성우이다. 공식적으로 공채에 당당히 지원하여 성우의 길을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공채에 지원할 나이와 상황이 맞지 않다면 내 목소리를 대중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많이 만들어 언더 성우로 활동해 보는 것도 괜찮은 전략일 듯싶었다. 어쨌든 성우의 꿈을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다.


  두 번째 수업에선 강사님께서 출력물을 나눠주셨다. 그 출력물에는 유명한 노래 가사와 시가 대, 여섯 개 정도 적혀 있었다. 강사님께서 말씀하셨다.


" 이 중 하나를 골라 앞에 있는 마이크 앞에서 낭독을 해 보는 거예요. 한 명씩 나와서 먼저 자기소개를 하고 본인이 고른 것을 낭독해 주시면 됩니다. 녹음해서 피드백도 듣고 수업 마지막 시간에는 똑같이 낭독해서 오늘 한 것과 비교해 볼 거예요!"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여 낭독 연습한 것을 영상으로 만들어 올리고 있긴 했었지만, 실제 성우 분과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앞에 나와 내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게 부담스럽고 쑥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성우라는 꿈을 가지고 있다면 언제든 낯선 이들 앞에서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꼭 이겨내야 할 과정이었다. 용기 있는 수강생들부터 한 명씩 마이크 앞으로 나와 자기소개를 하고 본인이 고른 글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수강생의 자기소개를 하는 것을 먼저 들어보니, 수업을 듣게 된 동기가 꽤 흥미로웠다.  회사 중역이 되었는데 직원들 앞에서 카리스마 있게 말하고 싶어서 이 수업을 신청한 분도 계셨고, 발음이 좋지 않고 말 더듬이 심한 것을 고치고 싶어서 오신 분도 계셨다. 실제 성우와 오디오 크리에이터의 꿈을 갖고 온 스무 살 초반 가량의 친구들도 있었고, 버킷리스트로 본인 목소리가 들어간 오디오북을 제작해서 소장하고 싶다는 중년의 여성 분도 계셨다. 이어서 낭독도 했었는데, 아무래도 목소리에 관심이 있어서 스스로 찾아온 수업이기에 대부분 수강생들은 좋은 목소리로 자연스러운 낭독을 했다.


  수강생 몇몇이 나가 먼저 발표한 뒤 중간쯤에 내가 스스로 나가서 마이크 앞에 섰다. 마음속으로 할 말을 준비하고 나갔음에도 막상 앞에 서니 상당히 떨려서 말이 끊기고 더듬거렸다.


"저는 37살이고... 30살에 결혼하여 4살 난 딸이 있습니다. 딸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니... 딸이 아주 좋아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어렸을 때부터 반 아이들에게 만화 캐릭터와 선생님을 흉내 내며 웃겼던... 행복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지금이라도... 성우라는 꿈을 갖고 도전해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 이 수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고른 글을 낭독했다. 강사님은 내 목소리를 녹음하기 시작했고, 모두가 숨죽여 내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혼자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방 안에서 녹음하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왔다. 오죽하면 왼손으로 들고 있던 출력물이 지진난 듯 흔들리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더 잘해야겠다는 부담감이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고, 긴장하다 보니 내가 방에서 혼자 하던 때보다 좋지 않은 목소리, 발성, 호흡이 나오는 게 스스로 느껴졌다. 겨우 겨우 낭독을 마치고 민망하다는 듯 빠르게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수강생들은 그래도 박수를 힘껏 쳐 주었다.


  모든 수강생들의 낭독이 끝나니, 거의 수업이 마칠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다음 주에는 오늘 낭독 녹음한 것들을 하나씩 같이 들어보며 강사님의 피드백이 있을 예정이다. 녹음본이 얼마나 엉망진창일지 벌써 걱정이 되었지만, 솔직한 피드백을 받고 고쳐나갈 수 있으면 그것만큼 훌륭한 방식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보자는 어쨌든 지질한 과정을 거쳐야만 하므로, 성장을 위해선 겪어야 할 단계라 여겼다. 강사님과 수강생들과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나눈 뒤, 밤 10시가 가까워오는 시간에 집으로 향했다. 금요일 밤에 퇴근을 하고 뒤늦은 내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살짝 뿌듯한 느낌이 들어 피곤한 기색에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내에게 전화를 하니 아이는 잘 준비를 한다고 했고, 괜히 미안해서 아내가 좋아하는 맥주를 사갈 테니 집에 도착하면 같이 마시자고 말했다. 저녁을 먹지 않았음에도 배는 그리 고프지 않았지만, 아내와 맥주를 마시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할 생각에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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