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 학원을 다니고 성우지망생 카페와 오픈 채팅방에 소속되어 있으면, 방송사의 전속 성우 모집 공고에 대한 소식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이번 9월에 전속성우모집 공고가 올라온 방송사는 대원방송이었다. 요즘 들어 방송사에서 전속성우를 모집하는 추세가 많이 꺾였다고 들었는데, 외화 더빙이나 라디오 드라마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품들이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더 이상 시청률이 나오지 않기 때문인 듯했다. 예전 나의 어릴 적을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주말 밤에 TV로 미국 또는 홍콩 영화를 즐겨 보셨고, 어머니는 공장에서 일하며 라디오 드라마를 자주 들으셨다. 어릴 적 내가 그런 프로그램들을 직접적으로 향유한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 곁에서 어깨너머로 듣고 본 것들이 추억으로 남아있다. 지금은 방송사 중 오직 KBS만 라디오 드라마를 진행한다고 한다. 그만큼 직접적인 수요층이 감소했고, 유튜브나 넷플릭스 등 다른 매체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아직 정규 방송 중에 애니메이션 더빙은 성우가 활동하기 좋은 시장인 듯하다. 이번 9월 공채 모집의 대원방송이 그렇고, 조만간 있을 투니버스도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 전문 방송사들이다.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아이들만 보는 것에서 성인들도 즐길 수 있는 매체가 되었다. 그만큼 수요층이 넓어졌고, 작품성 또한 상당히 고급화된 것이다. 또한 특정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있는, 소위 '애니 덕후'들이 탄탄한 수요층을 형성하고 있고, 이로 인해 특정 캐릭터를 연기하는 전문 성우들의 인기도 급상승하고 있다. 애니메이션과 더불어 게임 시장에서도 성우들의 활약이 돋보이고 있다. 게임에서도 캐릭터 별로 필요한 목소리가 많고, 게임을 진행하기 위한 내레이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원방송에서 14기 전속 성우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성우지망생으로서 처음으로 전속 성우에 지원해 보기로 했다. 공고글을 상세히 보니, 만 19세 이상이기만 하면 일단 지원은 할 수 있었다. 1차로 지원 서류와 목소리 연기 샘플을 제출하고, 합격하면 두 번에 걸친 실기 테스트와 최종 면접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처음으로 응시하는 나는 우선 1차 서류에 합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목소리 연기 샘플을 준비하기 위해 대원방송 사이트에 올라온 남자 대본을 살펴보았다. 캐릭터 연기 대사가 다섯 가지가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모두 '원피스'라는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대본이었다. 원피스는 일본에서 제작한 만화책이 원작이고, 나 또한 그 만화책을 어렸을 때 즐겨 봤었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도 몇 번 보긴 했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만화책을 넘기는 손맛(?)이 더 좋았다. 20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아직도 만화가 연재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이 만화는 내가 죽기 전에 완결은 날 수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쨌든 원피스에서 주인공인 루피, 조로, 상디 등 각 캐릭터의 성격과 매력은 각기 달랐고, 이를 연기하는 것 또한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 예상해 볼 수 있었다.
도대체 성우들은 어떻게 원피스 캐릭터들을 연기했을까? 문득 궁금해져 검색을 해보기로 했다. 이미 유튜브에는 대원방송 14기 성우 공채 지원 시 참고할 수 있는 원피스 애니메이션 더빙판이 대본 길이만큼 짤막하게 편집되어 올라와 있었다. 세상이 참 빠르고 편해졌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하나씩 천천히 감상해 보았다. 아니, 이젠 단순히 감상이 아니라 캐릭터 연기를 분석해 보기 시작했다. 역시나 캐릭터와 목소리가 찰떡으로 맞아떨어져 있었고, 성우들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주인공 루피의 조증 가득한 미성은 정말 따라 할 수 조자 없을 정도였고, 저음역대인 내겐 감당 불가능한 영역인 듯했다. 서류 제출일까지 2주 정도 남아 있는 기간 동안 다섯 가지 대본을 거의 외우다시피 연습했다. 필살기를 쓰며 미친 듯이 소리 지르고 싸우는 대본들이라 몇 일간의 연습만으로 한동안 목이 쉬어버리기도 했다. 그동안 내레이션으로 발음과 발성에만 집중해서 연습했었는데, 이렇게 극단적인 캐릭터 연기는 이번 공채 지원하면서 처음 연습해 본 것이라 너무나 어려웠다.
목소리 연기 샘플을 만드는 와중에 지원 서류를 작성했다. 워낙 지금까지 회사에 신입 또는 경력직으로 지원서를 작성한 적이 수도 없이 많아서 대원방송 지원서 작성 항목들은 눈감고도 쓸 수 있었다. 지원동기, 입사 후 포부, 성격 장, 단점 등 일반적인 것도 있었고,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이유, 닮고 싶은 성우와 이유 같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항목들도 있었지만, 글을 풀어내 쓰는 것은 지금처럼 항상 연습을 해왔던 터라 술술 써낸 편이었다. 최종적으로 내가 듣기에 그리 어색하지 않은 녹음본을 추려 목소리 연기 샘플 파일을 다듬었고, 순서대로 편집하여 mp3 파일로 만들어 내었다. 그리하여 서류 제출 마감일 전날에 지원서와 함께 제출했다.
1차 서류 합격을 기다리는 기간 동안, 다른 분들이 지원한 목소리 샘플 음성을 유튜브에서 들어볼 수 있었다. 다들 나보다 성우지망생으로서의 경력이 길었다. 3년에서 5년 정도는 기본적으로 성우지망생으로서 활동하는 듯했다. 그분들의 연기는 나와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캐릭터에 억지로 끼워 맞추고, 기존 성우들이 했던 연기와 호흡을 어정쩡하게 따라 하는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이들은 나름대로 대본을 재해석하여 자기 목소리에 맞게 호흡과 톤을 조절하였다. 지망생 신분이지만 확실히 경력과 노련함이 돋보이는 샘플들이었다. 이들 중엔 본인의 이름을 걸고 성우지망생 유튜버로 활동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 분의 지원 샘플은 특히나 완벽하다고 느껴져서 기존 성우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파로 여겨졌다. 왜 아직까지도 지망생 신분으로만 남아있는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지원서를 제출하고 2주가 넘어가는 시점에서 대원방송 14기 전속 성우 1차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굳이 사이트에 접속해서 찾아보지 않아도 오픈 채팅방에 누군가가 합격자 명단을 캡처하여 올려놓았다. 당연히 내 이름은 없었다. 아예 기대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실력파 성우 지망생 녹음 파일을 들어본 후 난 아직 성우로서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이 가득한 상태였다. 아직 제대로 해본 적도 없기에 좌절할 것도 없었다. 그저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애니메이션 더빙을 미친 듯 연습해 보고, 엔지니어링 회사가 아닌 방송사에 지원서를 써본 모든 경험들이 너무 재미있었다. 게다가 앞서 얘기한 실력파 성우 지망생 이름도 합격자 명단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실력 있는 지망생들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실력에 더해 무언가의 매력이 더욱 돋보여야만 하는 것인가? 아직 난 그 답을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더욱 명확해졌다. 꾸준한 내레이션 연습으로 발성과 발음을 탄탄히 한 뒤, 연기와 더빙 연습을 시작해 보는 것이다. 답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실력의 차이는 명확히 존재하는, 예술의 영역으로 드디어 뛰어들 준비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