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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이애비 Dec 02. 2023

성우학원 상담받은 날

늦깎이 성우 도전기(10)

  몇 달 전부터 아무래도 혼자서 연습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 같아 성우학원 정규반을 등록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이트를 뒤져가며 여러 성우학원들을 살펴보았다. 재밌는 사실은 방송 연기 학원에도 성우과정이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나 성우도 방송에 필요한 연기자였다. 문제는 이렇게나 많은 성우 학원과 학원마다 다른 다양한 수업 과정 중에서 어떤 수업을 선택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결국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회사와 집을 쉽게 오가며 다닐 수 있는 위치와 평일 저녁에 퇴근하고 갈 수 있는 일정을 중점적을 보았다.


  보통 강남 근처에 성우학원들이 상당히 많이 몰려 있지만, 이곳에서 다니면 사람과 차에 치여 피곤함이 배로 올라갈 것 같았다. 그래서 강남과는 조금 떨어진 적당한 위치에 있는 학원을 선택하였고, 수업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기초반, 초급반, 초중급반, 중급반, 고급반 등 다양한 정규과정이 있었고, 그 외에도 라디오 더빙반, 애니메이션 더빙반, 발성호반 등 다양한 특별과정들도 있었다. 여름에 성우 취미반으로 두 달 다닌 후 혼자 연습한 지 세 달 정도가 흘렀는데, 아무래도 정규반으로 가려면 기초반부터 다시 들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아니면 평일에 빠지지 않고 참석할 수 있는 요일에 개설된 초급반이나 초중급반이 좋을지 수업 과정 선택에 고민이 되었다. 성우학원이 주 1회 수업이지만 등록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딱 맞는 수업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것이었다.


  나는 대뜸 성우학원에 연락하여 상담을 요청했다.


"네, OO성우학원입니다."

"성우학원을 다니고 싶은데 어떤 수업을 들어야 할지 몰라서 상담 좀 받으려고 하는데요..."


친절한 매니저님께서 원장님과의 일정을 조율해 준 끝에 상담 날짜와 시간을 잡을 수 있었다. 매니저님은 내게 상담에 필요한 내용을 미리 문자로 보내달라고 하였다. 나이, 성별, 성우공부기간, 희망하는 수업 등이었다. 가장 걸림돌은 나이였다. '나이가 많아서 수업을 안 받아주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들었다.



  드디어 성우학원 상담 날짜가 되었다. 저녁 6시 반까지 학원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회사 일을 빨리 끝내고 5시쯤 나와 버스를 탔다. 시간은 1시간 정도 걸리지만 다행히 환승 없이 한 번에 가서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예전에 내가 신혼살림을 차린 동네 근처라 이동하는 길 또한 익숙했다. 단지 저녁을 제때 먹지 못해서 배만 고플 뿐이었다. 가는 길에 성우학원에서 배출한 성우들을 검색해 보았고, 최근 대원공채에 합격한 이들의 생생한 수기도 읽었다. 읽다 보니 눈이 피곤하여 버스에서 눈을 감고 내가 성우가 되어 방송사에서 녹음하는 상상을 했다. 과연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조금 일찍 도착한 학원에는  3개의 녹음실이자 강의실이 있었고 가운데에 휴게실이 하나 있었는데, 전반적으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휴게실에 조금 앉아 있으니 시간에 맞춰 원장님이 나오셨고, 함께 강의실로 들어가서 상담 진행하였다.


"나이가 좀 있는 걸로 얘기를 들었는데, 몇 년생이신가요?"


역시나 나이가 걸림돌인 듯했다.


"아, 저는 87년생입니다."

 

"성우가 되고 싶다는 꿈이 어떻게 생기신 건가요?"


"오래전부터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남이 정해준 삶만 살다가 이젠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원장님은 시금 앉은 자세를 고쳐 잡으시고는 말했다.


"우리 학원은 기본적으로 성우 공채 시험을 준비합니다. 지금 다니고 있는 모든 학생들이 그래요. 성우 공채는 KBS, EBS, 대원, 대교, 투니버스가 있고, 매년 있는 건 아닙니다."


"네, 그렇군요..."


"나이를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요즘 공채에 붙는 나이가 뒤로 미뤄져서 30대들이 많이 붙습니다. KBS는 지난번에 마흔 살 초반도 붙었고, EBS도 30대 중후반이 붙었어요. 나머지는 애니메이션 방송이라 성우 연령대가 좀 낮긴 합니다."


"다행히 지금 제 나이도 도전해 볼만하겠네요."


"물론이죠. 얼마 전에 85년생 학생도 초급반 등록하고 갔어요."


그가 누구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고, 지금 내 상황에 빗대어 생각하기 시작했다.


"성우 준비하는데 평균적으로 3~5년 정도 걸린다고 들었는데... 거의 마지노선이네요."


"네, 보통은 그 정도인데 10년 걸린 사람도 있고, 빠르면 2년 안에도 붙는 사람이 있어요. 근데 결혼은 아직 안 하셨나요?"


"아뇨, 했습니다."


"아이는 아직 없으시고요?"


"아뇨, 애도 있습니다. 지금 네 살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원장님은 본인의 예측이 다 빗나가자 조금은 당황하시는 듯했다. 어색한 상황을 조금 수습하고자 내가 곧바로 이어서 말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느라고 성우라는 꿈은 아예 생각도 못했죠. 그러다 애가 네 살이 되면서 키우는 게 조금 수월해져서 최근에는 성우 취미반도 들었습니다."


"그럼 공부한 기간이 성우 취미반 두 달이 다인 거죠?"


"네, 맞습니다."


"그럼 거의 기초반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기초반은 인원이 6명 다 차서 내년 1월이 되어야 들으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초급반이 있긴 한데 두 달 취미반으로는 거기서 수업 따라가기는 좀 힘드실 것 같고요."


"아, 그럼 내년 1월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걸로는 1:1 반이 있긴 한데... 시간당 10만 원 꼴이라 비용이 좀 셉니다."


"1:1반은 일정이 어떻게 되나요?"


"성우 선생님들한테 여쭤보긴 해야 하는데 주 1회 1시간씩이고 평일 저녁이나 주말 시간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선생님과 얘기하면 주마다 시간 조율은 조금씩 가능할 겁니다."



  갑작스레 깊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내년 1월에 다른 사람들과 같이 기초반부터 차근차근 갈 것인지, 비용은 조금 더 들더라도 단독 속성으로 빠르게 갈 것인지 결정을 해야 했다. 각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원장님께서 말씀하셨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돌아가셔서 더 고민해 보시고 말씀해 주세요."


"네, 좀 더 고민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는 학원 밖으로 나와 집에 가는 버스에 올랐다. 상담을 통해 성우가 되는 꿈을 갖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아니라는 사실과 열심히만 한다면 2년 안에도 성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내게 희망을 주었다. 반면에 학원은 결정되었지만 어떤 수업을 들어야 할지에 대한 부분은 새로운 고민으로 남았다. 결국 돈이 문제다. 한 달에 학원비로 30만 원 잡고 최소 2년을 수업을 듣는다고 해도 720만 원이라는 거금이 드는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꽤나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씁쓸한 현실에 집에 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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